제주문화역사나들이길

세화하도 제주역사나들이 8차 세화-하도 탐방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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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나들이 8차 탐방코스는 해녀박물관을 출발하여 해녀항일기념탑을 지나 숨비소리길과 올레21코스 일부를 지나 아름다운 하도리 마을 안길을 거쳐 토끼섬,별방진, 세화도구리통을 거니는 13Km 길입니다.

■제주 해녀박물관

제주의 해녀는 제주에서의 삶을 대표한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 이유가 크겠지만 화산섬에서의 척박한 토양은 그들을 바다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바다 역시 녹록치 않아 삶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녀들의 땀과 눈물이 더해져 갔지만 바다는 여전히 더함도 덜함도 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내어준다. 해녀는 아니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는 해녀들이 있지만 점차 줄어 들어 안타까움이 들게 한다. 세상의 변화를 그 누가 거스를까.

해녀분들과 관계기관의 노력으로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제주해녀문화'가 한국에서 19번째로 등재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해녀물질 출처-제주해녀박물관


제주해녀박물관 전경

해녀박물관은 2006년도에 개관하였다.  86,556m2의 넓은 부지에 해녀항일기념탑과 함께 한다.


해녀박물관 내부 전시물

해녀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쓰게된다. 원래 제주에서는 잠(潛)자의 제주식 발음이 아래아가 들어가 "ᄌᆞᆷ"인'  '좀녀(ᄌᆞᆷ녀) 또는 좀녜(ᄌᆞᆷ녜) '라고 불렀다. 다만 '위백규'의 [존재전서](1791)에 완도에서 '해녀'가 전복을 따는 모습을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널리 쓰인 표현은 아니지만 해녀라는 용어가 전근대시기에도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제주해녀박물관

바다로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물질' 이라고 한다.

물질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탐라순력도 병담범주에 표현된 해녀(잠녀)의 물질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41면 중 <병담범주> (1702년)에는 용두암 부근에서 물질하고 있는 해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1702년~1703년 기간 동안 1702년 10월 29일~11월19일까지 21일동안의 순력과 재임기간 중 참여한 행사의 장면을 화공 김남길로 하여 그림으로 남긴 서문 2면과 41면의 화첩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이형상 목사가 1703년 5월에 이임하였으니 병담범주에 표현된 장면은 늦가을에서 초봄의 시기일 것이다.

병담범주는 이 추운 계절에 변변한 장비와 의복이 없이 차디 찬 바다에서 물질하는 좀녀들의 이루말할 수 없는 고통의 작업을 보여준다. 병담범주는 용연계곡에서 경치를 즐기며 양반네들이 기생을 끼고 노는 풍류를 묘사했으나 그 옆에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좀녀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좀녀가 전복을 따는 수고로움을 애처럽게 여겨 조선 초기 세종때 제주로 부임한 '기건'목사와 같이 전복과 같은 해산물을 밥상에 올리지 말라한 선량들도 간혹 있었지만 관리와 양반들의 가렴주구는 근세까지 내내 제주 사람들을 괴롭혔다.



출처-제주해녀박물관

그러면 왜 힘든 물질을 제주에선 여자가 도맡아 하고 있을까.

조선시대 기록에는 남자인 포작인(鮑作人)들이 전복을 채취해 진상해 온 것으로 나와 있다. 수심이 깊은 곳에서는 남자인 포작인들이, 비교적 얕은 수심에서는 여자들이 미역같은 것을 채취하였다. 그러나 포작인들에게는 과도한 진상과 공납이 부여된다. 남자는 20필, 여자는 7~8필에 해당하는 많은 액수를 부과한다. 또한 포작인들에게는 군역으로 잠수부와 격군의 의무도 부과했다. 무리한 작업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단신으로 또는 가족들을 데리고 섬을 떠나는 이가 많아지자 급기야 조선정부는 인조6년(1629년) 제주인에게 출륙금지령을 내린다. 이로 인해 섬사람들의 고통은 벗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장거리 항해를 위한 선박의 건조도 금지하니 제주인의 뛰어난 조선기술과 항해술은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몰래 도주하는 포작인들이 속출해서 포작인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자 아예 숫자가 많은 좀녀들에게 포작의 의무를 다 떠넘긴다.

제주의 해녀는 이런 슬픈 사연으로 탄생된 것이다.


60년대 해녀 -출처 제주해녀박물관

부산에도 천여명의 해녀가 등록되어 있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잠수기업가들을 동원해 제주 바다자원을 싹쓸이 해갔다. 물질을 해도 나올 게 없어지자  멀게는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해서 경상도, 전라도, 일본, 중국 등지로 많은 해녀들이 생계를 위해 강제적이든 자발적이든 많은 사연을 안고 진출했다. 이들을 출가해녀라고 부른다.

부산 해녀의 경우는 영도에 집중된다. 조선말 단발령으로 인해 말총으로 만든 갓이나 탕건의 수요가 없어지고 일제에 의해 바다자원이 고갈되자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해녀들이 부산 영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주은행의 도외 지점이 서울말고는 육지부에서는 부산 영도구가 유일하다고 하니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해녀에는 계급(?)이 존재한다. 상군,중군,하군이 그것이다. 상군해녀는 수심 15m가량의 바다에서 2분정도 숨을 참고 작업하는 베테랑이고 중군은 10m정도, 하군은 얕은 바다에서 작업한다. 나이가 들거나 어린 해녀는 기량이 적어 하군 해녀일 수 밖에 없다.



약을 복용하는 해녀-출처 제주해녀박물관

뇌선.

바다에서의 물질은 늘 고통이었다. 잠수병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었고 고단한 작업은 우리네 어머니들의 육체를 한없이 갉아 먹었다. 물질 전이나 후에 복용하던 약이 뇌선이다. 비마약성 진통제로 육신의 고통을 이 약으로 잠시나마 달래고 또 바다로 들어갔다.


소중이를 입은 해녀-출처 제주해녀박물관

현재의 고무작업복 출처-두산백과

해녀의 고무작업복은 80년대 들어서야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엔 얇은 천으로된 물옷 즉 소중이를 입었다. 목숨만큼 소중해서 물옷을 소중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차디찬 바다에서 그녀들은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어떻게 그 고통을 견디고 가족들을 먹여 살렸을까. 해녀의 노래는 그 아픔을 녹아낸다.

요물 아래 은과 금이 쌩였건만(깔렸건만)

높은 남(나무)의 열매로다

요영 하멍 악담 부담 벌어서

없는 부모 한생활을 시킬거멍

어느 동생 글공부를 시킬거냐

만날 천날 벌어도 내 먹기가 바빠진다.

일본서도 들어온 새여

오늘 가져 넬 가젠 하난

청새 밭디 첫 이슬 노령

놀개(날개) 젖언 못 놀암더라

물도 뱅뱅 돌아진 섬에

삼시 굴멍 물질 호영

한푼 두푼 모은 금전

정 든님 술 값에 다 녹아 간다.

악하고도 모진 것은 임이로다

임이라고 만났더니 임은 아니 원수로다.

보름달 같은 요 내 얼굴 어딜 가고 아니오다

안동 같은 요 내몸이 철대같이 몰랐구나

수덕 좋은 선왕님아

앞발로 해어 치멍

뒷발로 거더 차멍

고등 생복 좋은 여로

得達하게 해여 줍서

숨비소리는 물속에서 나올때 일시에 폐에 가득찬 이산화탄소를 내밷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이다. 지금도 바닷가에서 작업하는 해녀들을 만날 때 들을 수 있다.

물숨이라는 말이 있다. 해녀를 주제로한 다큐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숨을 쉰다는건 공기를 마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숨을 쉴때 공기가 아닌 물을 마신다는건 즉 죽음이다. 최근에도 고령의 해녀들의 작업 중 안타까운 사고 소식이 간간히 들린다. 고통스러운 일상의 작업과 고단한 삶 끝에 물숨은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들은 강했다.


바람 방향에 따른 제주어 명칭

■ 제주항일운동 기념탑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제주해녀항일운동은 1931년부터 1932년 1월까지 지속되어 연인원 1만 7,130명이 참여하고, 집회 및 시위회수가 238회에 달했던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해녀들 뿐 아니라 청년과 일반 농민층도 가담하여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국내 최대의 여성 주도 항일투쟁인 동시에 최대의 어민봉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해녀항쟁은 부당한 해산물 수매가격을 둘러싼 분쟁으로부터 비롯됐다. 당시 관제 해녀어업조합은 뇌물을 제공한 일본인 상인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해산물을 매입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었는데 이에 분노한 해녀들의 집단 항의가 1932년 1월 7일 세화오일장에서 일어났고, 1월 12일 해녀어업조합장인 다쿠지 도사가 면사무소를 방문할 때 손에 호미와 빗창(전복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도구)을 들고 총궐기하였다. 이때 조합장과 담판을 벌인 해녀들이 제시한 요구사항은 지정판매 반대와 공정한 입찰, 조합비 조정, 조합재정공개, 손해배상 등이었다.

제주해녀항일기념탑은 총궐기 당시 해녀들의 집결지였던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의 일명 ‘연두막동산’으로 불리는 곳에 세워졌다.]

출처- 두산백과


부춘화,김옥련,부덕량 흉상

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하여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갖은 고문을 당했던 세분의 흉상이 기념비 옆에 세워져있다. 매일같이 물질을 하며 생사를 넘어들었던 우리네 해녀들에게 일제의 부당함에 대한 항거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한 숭고한 마음이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 반성하고 되돌아보게 한다.

■숨비소리길


숨비소리길 안내판

해녀들이 밭일을 하며 부지런히 다녔던 길을 제주도에서 '숨비소리길'로 코스를 만들었다.


노란꽃(?)

가을은 길가 돌담 밑에 한 줌 꽃을 뿌려놨다. 꽃이름을 알길 없어 인터넷 검색 중 어느  블로그에 같은 꽃 사진이 있어 들어가봤더니 허탈하게도 그냥 노란꽃이랜다. 분명 이름이 있을텐데. 꽃에 대한 나의 무지도 무지거니와 나이들면 꽃을 좋아하게 된다는데 벌써 그럴 나이가 됐나보다.


슬레이트 지붕위의 타이어

제주의 바람은 지붕에 타이어를 이게 만들었다. 제주 북동부지역은 몇개의 오름을 제외하곤 평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세찬 바람을 피할 수 없다. 지붕위의 타이어 갯수는 바람의 등급을 보여주는 듯 하다.  타이어가 여섯개.


밭의 배수로

월정  밭담길에서 처럼 밭에 깊은 배수로를 파 놓았다. 침수로 인한 피해가 커서 물을 빼야 농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숨비소리길 밭담

숨비소리길에도 밭담이 이어진다. 아무리 걸어도 밭담길은 끊어지지 않을 듯이 이어져 있다. 밭에는 새로 심은 씨앗이 싹을 텄고, 붉게 농익은 당근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기도 한다. 가을 햇살은 수확과 파종의 손길 모두를 재촉한다. 나그네만 햇살을 이고 한가히 발걸음을 뗄 뿐이다.


비포장도로

원래 제주의 길은 이랬다. 작지(자갈)투성이의 거친 길이다. 비오면 나막신을 신었고 밤에는 돌부리를 걷어차기 일쑤다. 이런 길을 부지런히 오가며 고단한 삶을 이어갔을 우리 조상들이다. 걸으면서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는 그 불편함 보다는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나그네에겐 그저 잠깐의 짧은 불편함일 뿐이다.


여기서 숨비소리길과 헤어진다. 우측길


제주 가을 억새

가을은 청명함으로 나그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파란 가을하늘 아래 바람따라 일렁이는 억새는 짙은 가을의 정취를 뿜어내고 있다.


묘비

하도리 일대를 다니면서 보이는 길가의 묘비에 울타리가 쳐져 있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이 동네만의 풍습인지 알 도리가 없다. 궁금증을 뒤로하고  가을길을 재촉한다.

■하도리

하도리는 제주시 구좌읍의 동쪽 해안에 자리 잡은  반농반어 마을이다. 면수동·창흥동·서문동·동동·굴동·신동·서동 등 7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당근이 가장 중요한 소득원이며 감자, 월동무우도 많이 재배한다. 해산물 채취와 축산도 활발하다.

하도리는 해발 50m이내의 평지에 위치한다.

1400년 이전부터 도의여개를 중심으로 촌락이 형성되어 '도의여 마을'로 불리다가 17세기말 마을이 커지면서 '상도의여'와 '하도의여'로 나뉘게 되고 이 마을들이 지금의 상도리와 하도리로 되었다.


하도리 마을 안길

하도리 마을길은 눈으로 걸어보자. 굳이 하는 설명은 거추장스럽다.


북풍을 막기 위한 어느 민가의 대나무 방풍림


지붕을 최대한 낮춰 놓은 집


북쪽으로 돌담과 대나무를 심은 집


어느집 올래에 당당히 서있는 두그루 폭낭


창고의 지붕 뼈대

세월이 그 기능을 다하게 한 창고의 지붕 뼈대로 가을이 파란 하늘을 선사하고 있다.







하도리 마을은 걷기만 해도 그저 좋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마치 영화 세트장을 연상케 하지만 나그네의 착시일 뿐이다.


그네

마을 쉼팡이었을 퐁낭에 누군가 정성스레 그네를 걸어 놓았다. 그네를 타보기는 커녕 앉을 엄두도 안나 옆에서 사진 한장으로 만족한다. 동행이 있다면 기필코 앉혀 그네를 밀었을거다.


돌담과 지붕과 가을하늘


지붕과 모래 주머니

아마도 외지인이 사는듯 하다. 여기는 모래주머니가 여섯개.  하도의 바람은 현대식 주택 지붕도 예외없다. 이집을 짓고 사는 이는 어느날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으리라. 그 생각을 하니 현지 사정을  몰랐을 집주인의 사연을 살필 겨를없이 괜한 웃음이 난다. 미안하다.



길가에 핀 가을 꽃

꽃이름에 대한 무지여도 좋다. 그냥 가을 꽃이 나그네를 반긴다. 하도리엔 가을 꽃도 이쁘게 폈다.


대문

하도리엔 집에 대문이 없다. 제주가 삼무의 고장으로 대문이 없다는 건 옛날 얘기로 알지만 하도리에는 새로 집을 지어도 대문이 없다. 대문이 있었어도 떼어낸 흔적이 역력하다. 하도리를 걷는 동안 대문 있는 집 딱하나 보았다. 과연 대문의 기능이 무엇인지 새삼 헷갈린다. 하도리 마을에선 대문이 있는 집은 부자연스럽다. 사람들이 서로 믿고사는 진짜 마을이다.

예전 제주에선 다들 그렇게 살았건만.

내가 사는 와흘리 집에 대문을 안단 것으로 숟가락 하나 얹어본다. 나도 제대로 된 제주살이 하고 있다고.


어느 집

하도리 마을을 한참 지나 만나는 외딴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깔이 강렬하다. 어울림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하도 어촌체험마을


어촌 체험마을 이정표


우도,성산일출봉.지미봉,두산봉

하도리에서 어촌체험마을을 조성해 놓았다. 여기에선 우도와 성산일출봉과 지미봉, 두산봉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불턱 내부

불턱을 체험해 볼 수 있게 조성하였다. 소풍삼아 나들이 하기에 제격이다. 소라등을 구워먹을 수도 있다. 언젠가 채비하고 와서 벗들과 불피우고 술한잔 기울이고 싶다.


원담


원담과 우도전경




원담내부에 고인 바다


우도와 성산일출봉

어촌체험마을에선 체험활동보다 바라다보이는 풍광이 아름답다. 가보면 안다.

■토끼섬(난섬)


토끼섬과 원담

토끼섬은 우리나라 유일의 문주란 자생지이다.  원래 바깥쪽에 있는 작은 섬이라는 뜻으로  "난들여"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난섬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한 듯 하다. 아니면 문주란의 난에서 따왔을지도 모르겠다.

토끼섬은 문주란들이 활짝 그 흰꽃을 피웠을때 섬의 모양이 토끼를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토끼섬엔 토끼가 없다. 내 눈엔 토끼처럼 보이지 않는데 굳이 시비걸 요량은 추호도 없다.


토끼섬- 출처 블로거 신혁님

960여 평의 면적에 백사장과 10여 미터 높이의 현무암 동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조시에는 걸어갈 수 있고 만조때에는 백사장과 동산이 분리되고 또한 육지부와도 분리된다.


토끼섬의 문주란-출처 시티맵

토끼섬의 문주란 자생지는 천연기념물 1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문주란 자생의 북방한계선이라고 한다. 섬의 출입은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간조시에 걸어서 갈 수 있다지만 혼자서 건너갈 엄두가 안난다. 먼발치에서 위치만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미역 건조

검은 현무암에 뿌리를 내리고 여름한철 짙은 갈색으로 무성했던 미역은 이제 해녀들의 손길에 제가 난 현무암의 검은 빛깔로 돌아간다.



하도 환해장성

바닷가에는 곳곳에 환해장성이 보인다. 하도 바닷가에도 마찬가지이다.


송죽국

길가 담벼락 아래 간만에 이름아는 꽃이 보인다. 송죽국이다. 이름의 유래를 알고싶어  검색해보니 송종국선수 기사가 나온다. 대단한 검색기능이다. 사용자가 검색어를 잘못 썼을까봐 배려했을 것이다.


바람에 쓸린 나무

제주의 세찬 바람은 나무를 빗질하듯 한쪽으로 쓸어 넘긴다. 바닷가 반대방향으로 자란다. 놀라운 자연의 적응력이다.


폐창고와 오래된 트럭

창고도 차도 오래됐다. 지금은 버려진듯 주변엔 잡초만 무성하다. 50년도 더 되었을 낡은 트럭은 소라게처럼 창고에 몸을 담고 얼굴만 빼곰 내민채 멈추어 있다.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다.


트렉터 삽

조각공원에나 있을법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 온다. 트랙터의 삽(?)이다. 삽을 받치고 있는 블록들이 눈에 들어온다. 절묘하다.동네에 천부적인 설치 작가가 숨어 있는 듯하다.


이랑과 고랑

수확을 끝낸 밭에 다음 농사를 위해 곱게 빗질을 해 놓았다. 자연이나 인간의 밭이나 철마다 모습을 달리한다. 살아있는 모습이어서 좋다.

■별방진

[1973년 4월 3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종 때 제주목사 장림(張琳)이 김녕읍에 있던 진을 이곳으로 옮겨 별방이라 이름하였다. 성의 총길이는 1,008m, 높이는 3.5m 정도이다. 성에는 관사와 창고가 있었고, 동·서·남의 세 곳에 문이 있다. 성을 쌓을 때 흉년이 심하여 부역하던 장정들은 인분(人糞)까지 먹어가며 쌓았다는 이야기가 인근에 전해온다. 구좌읍 하도리는 옛 지명이 별방이며, 서문리는 별방의 서문 안에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특별자치도는 고려 때부터 동부와 서부 해안에 석성을 쌓아 군인들을 주둔시켜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는데 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애월진, 명월진, 차귀진, 모슬진, 서귀진, 수산진 등 9진이 있었다.] 출처-두산백과


별방진 남쪽 입구 성벽



□별방조점


탐라순력도 별방조점

[제주목 동부의 최대 군사기지인 별방진의 순력모습을 그린 것으로 성정군의 규모는 423명, 우마수는 흑우 247마리, 말 946마리가 있고 이 우마를 관리하는 목자와 보인이 187명이 있었으며 별방진의 창고엔 곡식 2860석이 보관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출처-문화콘텐츠닷컴

□별방시사


탐라 순력도의 별방시사

[별방진성에서 벌어진 활쏘기 대회를 그린 광경으로 제주도내 10개 지역에서 온 교사장(활쏘기를 가르치는 훈련교관) 10명의 인솔아래 208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출처-문화컨텐츠닷컴


별방시사나 별방조점의 그림에서 보면 별방진내에 조그만 포구처럼 만이 들어와 있다.

조수(潮水)라고 씌어진 부분이다.




별방진 안의 저류지

처음엔 이 저류지가 성내의 용천수일꺼라는 생각을 했다. 별방조점을 보고서야 성안으로 들어와있던 바닷길의 흔적임을 알았다. 성의 북쪽을 매립하여 지금은 잃어버린 바다의 한 조각이다.


하도 한개창 포구

별방진 성곽 위에서 내려다 본 한개창 포구이다. 산뜻하게 잘 정비되어 있어 예전의 모습을 알 길은 없으나 이 포구에 어선과 병선이 수없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방파제 한가운데 'Hado'라고 쓴 싸인물이 눈에 띈다. 이곳 사람들의 자기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다.





보시코지 불턱,모진다리 불턱,생이덕불턱

별방진을 지나 해안도로로 접어든다. 원담(갯담)이 잘 보존되어 있는 무두망개가 나온다. 보시코지 불턱과 모진다리 불턱을 지나면 환해장성의 흔적이 보이고 다시 생이덕 불턱이 나온다. 한 마을에 불턱이 많다는건 그만큼 빈번한 물질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마을 바다 터를 전부 누벼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기에 곳곳에 불턱을 만들어 물질을 했을 것이다. 그 수고로움에 마음이 짠하다



하도의 가을 들녘

어느새 발길은 하도를 지나 다시 세화로 접어든다.


집 울타리가 토성인 듯 보이는 민가


토성 안의 민가

세화마을로 접어들면서 특이한 가옥이 눈에띈다. 토성처럼 생긴 언덕을 울타리삼아 집들이 들어서 있다. 바람막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듯 했다. 원래 작은 토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집 지을때 그냥 방풍벽을 만든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자연적으로 생긴 언덕은 아닌것 같다. 그저 궁금하다.


술집 간판

어느 술집 간판에 적힌 문구가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철없는 어른들의 아지트. 술을 마시면 다들 철이 없어진다. 마셔 본 사람은 다 안다. 그러니 가끔씩 사고도 치는거다. 그래서 철없는 거다.


주황 파랑

세화 바닷가 마을도 외지인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제2의 월정리가 머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진 여유가 있어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마을을 돌아볼 수 있어 좋다.




도구리통(용천수)

도구리통을 끝으로 출발지인 해녀박물관으로 들어서니 그림자가 길게 늘어서 있다.


 

입회비 및 후원계좌 : 제주은행 6901008085
(예금주:사단법인 제주문화역사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