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행원 월정-행원리 탐방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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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 밭담체험 테마공원
밭담 체험 테마공원 전경
밭담 체험 테마공원내 전시물
소규모이지만 나름 제주밭담 및 돌담들에 관련한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매년 밭담 축제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시공간을 찾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박제된 모습보다는 발품을 팔아서 아직도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는 제주 고유의 돌담길로 걸어가 보자. 느리면 느린대로 빠르면 빠른대로 저 마다의 보폭으로.
■월정 진빌레 밭담길
제주밭담은 2014년 FAO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의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농수산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밭담의 길이를 합치면 약 22,000km라고 한다.
FAO의 세계중요농업유산은 세계 각지의 전통적 농업활동과 경관, 생물 다양성, 토지이용체계를 선정해 보전하고 차세대에 계승하고자 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2018년을 기준으로 20개국에 50여개의 농업유산이 등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에 제주 밭담과 청산도 구들장 논이 등재되었고, 2017년 경남 하동군 화개면 전통차농업이 국내 세 번째로 등재되었다.
돌담에는 여러유형이 있다. 쌓는 목적과 위치에 따라 거주공간에 축담,울담,올레담이 있고 삶의 터전엔 밭담,잣벡담,머들,원담(갯담)을 만들었으며, 마소를 위한 목장의 경계로 잣담이 있다. 무덤엔 산담을 쌓아 산불, 말,소에의한 훼손을 방지코자 했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환해장성이 있고, 제주의 3성을 둘러싼 성담이 있다.
쌓는 방식에 따라서 접담(겹담),외담,잣굽담이 있다.
-축담 : 집을 짓기 위해 쌓은 담이다.
-울담 : 집의 울타리를 형성하는 담이다.
-올레담 : 집 출입구로 이어지는 올레를 구성하는 담이다.
-밭담 : 밭의 경계를 이루는 담
-잣벡담 : 밭에서 나온돌들을 두껍게 쌓은담, 길이 없는 밭의 통로역할을 한다. 잣담의 '잣'은 자갈을 의미하는 '작지'의 '작'에서 유래한다.
잣벡담위로 나 있는 길을 잣질이라 한다.
-머들 : 암반위에 잔돌을 쌓은 무더기, 쉬는공간이자
남은 돌을 보관하는 역할도 해서 돌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서 쓸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원담 : 육지부에서는 독살이라고 불리는 어로시설로서 바닷가 조간대에 돌담을 쌓아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을 목적으로 쌓은 돌담이다. 지역에 따라 갯담이라고도 불린다.
-잣담 : 목장의 경계로서 말과 소가 한라산이나 다른 목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쌓은 돌담을 의미한다. 잣담은 제주의 행정구역을 나누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하는데 마침 멸실되어가는 잣담의 보존노력이 진행되고 있어 다행이다.
인터넷상에는 잣담을 잣벡담의 다른 표현이라는 자료도 있고 잣성의 다른 이름이라는 자료도 있다. 그러나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의 주장에 의하면 잣성이라고 누군가 한번 신문에 쓰고 난 이후 잣성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제주에서는 잣을 잣성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즉 잣담은 잣성의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제주사람들은 이를테면 돌담 쌓아진 걸 보면 으레히 이건 하잣이여 또는 중잣이여 라고 대답했다”며 “잣성이라는 잘못된 용어를 쓰지말고 그냥 밭에 있으면 밭담, 집에 있으면 집담, 울타리면 울담,산소에 있으면 산담,성에 있으면 성담이라고 부르듯이 잣성을 잣담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잣성은 아예 없던 용어라는 의미이다. 또한 잣담이 잣벡담과 같은 말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며 잘못된 용어의 사용은 바로잡으려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산담 : 무덤 주위에 쌓은 담이다. 주로 겹담으로 쌓았다. 산불이나 말, 소에의해 묘지가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쌓았다.
-외담 : 밭담의 대부분이 이 외담으로 되어 있는데 돌을 한겹으로 쌓은 담을 말한다.
-겹담 : 비교적 큰돌을 이중으로 쌓고 그사이를 잔돌로 채워놓는 쌓기방식의 돌담이다.
겹담
-잣굽담 : 잔돌을 먼저쌓고 위에 큰돌을 쌓은 담이다. 비가 와도 물이 잘 빠지는 역할을 한다.
이제 발걸음을 옮겨 진빌레 밭담길로 들어선다.
끝이 없을 듯 이어진 밭담길은 흑룡만리의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과 맞닿아 있는 지평선을 향해 있다. 파란 하늘 속으로 곧 날아오를 것만 같다.
흔히 모래밭은 물이 잘 빠지는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월정리 일대의 토지는 용암의 암반 즉 빌레 위에 바닷바람에 실린 모래가 쌓인 터라 비록 모래토질이어도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빠지지 않아 침수되기 일쑤이다. 그래서 지대가 높은 밭에서 내려온 빗물에 아래 밭이 침수되지 않도록 배수로를 만들었다. 육지에서의 논에 물을 끌어들이는 도수로가 있다면 제주에서는 그 반대의 기능을 하는 배수로가 있는 셈이다.
바람에 실려온 모래는 흙대신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다. 비록 모래 땅 한뙤기라도 정성스레 일일이 거름을 주고 가꾸어 당근, 무, 양파를 심어 생계를 이어갔다. 척박한 땅을 원망하기보다는 억척스레 살아온 우리 제주인이었다.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제주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에서 자연과학분야 지정 3관왕을 달성한 지역이다.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지정, 2007년 세계자연유산등재, 2010년 세계지질공원 인증이 그 것이다.
이 중 2007년 국내 최초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 된 것이다.
제주의 세계자연유산 중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의 동굴이 이곳 월정리 지하에 웅장한 자태로 자리하고 있다.
제주는 약 180만년 전에 화산활동이 시작되어 형성된 섬으로서 최근 1000년전까지 화산 활동의 기록이 있는 젊은 화산섬이다.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약30만~10만년전 거문오름에서의 수차례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에 의해 생긴 지하동굴인데 김녕굴 및 만장굴, 벵뒤굴, 당처물동굴, 용천동굴이 그것이다. 월정 진빌레 밭담길은 당처물 동굴과 용천동굴을 지하에 품고 있다.
월정리 일대 동굴 분포도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관련자료를 찾다가 안타까운 사실을 발견했다. 제주도 형성의 단초가 되는 화산활동은 180만년 전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거문오름용암동굴계의 상류지점이라 할 수 있는 만장굴의 형성시기를 제주관광공사의 비짓제주 홈피에서는 700만년전 제주의 화산 활동에 의한것으로, 한국관광공사의 '구석구석대한민국'에서는 250만년전 한라산의 폭발로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정작 세계자연유산제주의 홈피에서는 형성시기를 표기하지 않고 있고, 신정일의 '신택리지 제주편'에서는 700만년전으로, 강홍균의 '동굴기행'에서는 10만년전으로 단정하고 있다. 거문오름동굴계의 형성시기와 과정에 관해서 학계와 담당기관의 통일성 있는 자료의 정리와 홍보가 아쉽다.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은 바다의 모래를 끊임없이 육지로 실어 날랐다.
위의 지질도에서 보듯 오랜 세월 북서풍이 실어온 모래는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비스듬하게 거대한 사구지형을 만들어 냈다.
이 고장의 우리 제주인들은 거대한 자연에 맞설 수 없기에 이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을의 가옥도 자연스럽게 가급적 바람을 피하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지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처물 동굴
[당처물동굴은 1994년 인근주민이 밭농사를 위해 터고르기를 하던 중 발견되었다. 동굴의 총길이는 360m이며, 동굴의 폭은 5~15m, 높이는 0.5m~2.5m 정도이다.
동굴내부에는 수많은 탄산염 종유석 · 종유관 · 석순 · 석주 · 동굴진주 등이 분포하고 있어, 용천동굴과 함께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닌 세계적인 동굴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당처물동굴은 용천동굴과 함께 일반인에게 공개가 제한되고 있다.]-출처 세계자연유산 제주
당처물 동굴의 탄산염 석주-출처 세계자연유산 제주
동굴 상부에 쌓인 패각류로 만들어진 모래에 섞인 탄산염이 동굴천정의 틈으로 흘러들어 석회암 동굴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종유관, 석순,석주등을 만들었다. 용암동굴에 이러한 경우는 제주가 유일하다고 하니 경이롭고 소중한 우리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출입이 제한되어 직접 볼 수는 없으나 사진으로나마 접한 그 비경에 숨이 멎을 듯 하다.
□남지미동굴
당처물동굴의 주변을 탐사한 결과 그 연장선상의 동굴로 보인다. 비록 내부가 당처물동굴과 단절되어 있지만 당처물동굴과 비슷한 내부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용천동굴
[용천동굴은 2005년 전신주 공사도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동굴의 총길이는 3.4㎞이며, 동굴의 끝부분에는 길이가 800m 이상인 호수가 분포하고 있다.
[출처] 제주역사나들이 7차 월정-행원리 탐방코스|작성자 바람
용천동굴은 웅장한 용암동굴의 형태를 보이면서도, 이차적으로 형성된 탄산염 동굴생성물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특히 육각형의 주상절리의 틈 사이를 따라 동굴 내부로 유입된 흰색의 석회물질과 동굴벽면에 서식하는 노란색의 박테리아의 분포형태는 마치 호랑이 가죽모양을 연상케 한다.
동굴내부에는 이차 탄산염 생성물인 탄산염 종유관 · 종유석 · 석주 · 유석 · 동굴산호 등이 매우 다양하고 화려하게 분포하고 있다.
용천동굴 내부에는 토기편, 동굴뼈, 목탄, 조개껍질, 철기, 돌탑 등과 같은 역사적인 유물들이 발견된다. 이 유물들은 8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되며, 과거 제주도의 역사를 재조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출처 세계자연유산 제주
월정 밭담길을 걷는 나들이객에게 눈에 띄는 지형이 있다. 위성지도를 검색하니 아래 사진과 같이 나온다. 용천동굴 하류지역임이 틀림없다. 용천동굴의 하류 800m구간은 천년의 호수구간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이 지역은 필시 천년의 호수의 상부 지표면일 것이다. 묘한 흥분을 느끼면서 발을 디뎌본다.
당처물동굴지역은 돌담 울타리와 함께 출입금지 안내판이 있다. 여기는 아무런 표지도 출입제한 경고문도 없다. 주변지대보다 2m정도 모래로 돋구어 놓았고 중간에 소나무 묘목도 심어 놓았다.
그렇다면 걸어도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떼어본다. 지금 발디딛는 곳 밑 10미터 지점에 천년의 호수가 있다는 사실에 한걸음 한걸음이 흥분된다.
이곳이 트레킹코스의 명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먼 옛날 뜨거웠던 용암이 흘렀던 길을 따라 바닷가로 걸음을 옮긴다. 지금 나는 그때의 용암보다 빠르게 걷고 있을까 아니면 늦게 걷고 있을까. 수십만년전의 그 때가 가깝게 느껴진다.
■올레길 20코스
용천동굴 상단 길을 나와 우측으로 돌아서면 올레길을 알리는 간세다리 표시가 나온다. 우측길로 발을 옮기니 모래를 실은 바람이 눈을 제대로 못 뜨게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 곳에서는 모래밭이 모래만 있지 않다. 모래밭이 밭이 된거다. 모래밭엔 파(양파?)의 어린 줄기가 거센 모래바람에서도 당당히 파랗다.
당근은 모래를 이불삼아 붉은 빛 고운 뿌리를 단단히 내려 영글고 있다. 제주에선 다 이렇게 살아왔다.
세찬 모래바람은 지붕을 낮추었고 돌담은 높여놓았다. 옛날엔 초가였을 오래된 집이 역시 낡은 슬레이트를 이고 머리만 보여준다.
■월정리와 해변
남국의 지명유래(진성기저)에 의하면 거금 300년전에 무주(武州)라고 했었는데 1856년경 원봉선생(元峯先生)이 지형이 반월형으로 되고 해변이 모래로 이루어지니 멸치어장에 알맞고 이 부락을 바다에서 보면 선명하게 반월형으로 보이니 월정리(月汀里)라 호칭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부락창촌은 월정리 서쪽 해안에 생활용수가 풍부한 송포(松浦)가 있는데 약 300여년전에 제주도지사를 지낸 고 김인홍(金人洪)씨 선조와 김해김씨가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월정리(月汀里)의 '汀'은 물가 정이다. 즉 말그대로 '달을 닮은 물가' 라는 뜻인게다. 제주의 마을은 이처럼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예쁜 이름을 가진 곳이 많다.
축담으로 이루어집과 멋스럽게 잔돌을 붙인 요즘의 집이 올레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그나마 두집이 어울리는건 제주의 돌을 같이 품고 있어서 일게다. 개발붐에 시달리는 월정리가 그나마 이런 조화가 있어 조그만 희망을 가져본다.
월정마을로 들어서다 우측의 오래된 샛길로 들어가 본다. 지금은 차 한대조차 들어갈 수 없는 좁은 올레담 길이지만 옛날엔 짐을 실은 마차와 장을 보러 들고 나는 이들이 분주했을 것이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듯 잡초가 무성하고 농사관련 폐기물이 널브러진 좁은 돌담길로 들어서 본다. 한사람 들어서면 꽉차는 이 길은 제법 길어 약 200미터 남짓해 보인다. 이 길로 새참도 날랐을 테고 거름도 지고 다녔을 게다. 옛길을 걷는다는건 예기치 않은 장소를 만났을 때 의미를 더하는 것 같다. 옛길을 걷는 나들이객이 아니면 이렇게 버려진 길을 누가 걸어나 볼까.
반달을 닮은 월정해변은 지금도 물색이 곱다. 고운 물색과 모래는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아까 언급했듯이 원래 월정리는 모래바람을 피하는 방향으로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달의 물가를 따라 도로가 나고 옛날엔 집을 안 지었던, 아니 모래바람 때문에 집을 지을 수 없었던 곳에 상가들이 꽉 들어차 있고 지금도 공사중인 곳이 많다. 땅값은 터무니 없이 올랐고 인심은 그만큼 박해졌다. 개발과 보존의 영역에서 개발의 완전한 승리다. 월정리의 바람은 지금도 아랑곳 않고 부지런히 모래를 실어 나른다. 도로에도 건물에도 바람이 심한 날은 싸락눈 쌓이 듯 지금도 그 양이 엄청나다. 이 곳 상인들은 눈 치우듯 창틈으로 들이치는 모래를 쓸어내는 수고로움을 하소연 한다. 그러나 어쩌랴. 원래 자연이 내어주지 않았던 곳에 자리한 이들의 업보인 것을. 속내를 알리 없는 관광객들의 셔터소리와 웃음소리가 바닷바람소리에 마냥 흩어진다.
■행원리
자연마을로는 행원, 알동네, 중동 마을 등이 있다.
선조년대(1595년)에 국토방위의 요지이며, 포구가 좋아서 등대를 설치하고 어등개 또는 어등포라 불러오다가 약 120년전 행원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행원리의 지명 유래는 알 수 없다.
월정해변에서 행원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우측
행원마을로 가는 올레20코스 길
좌측길로가면 행원마을이 나온다
행원리 마을은 월정리와 달리 번잡하지 않다. 월정리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아직은 여느 해안 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우측으로 진입
민박집 간판. 표주박이 탐스럽다
한 때 주일에 사람들이 모이고 크리스마스때 동네꼬마들에게 사탕을 나누어 주었을 교회는 다른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흔적은 남아 지금은 창고로 쓰이고 있다. 십자가 대신 옆의 풍력발전기 날개가 이곳의 변화를 말해주듯 당당히 서 있다.
바닷가로가는 마을 안길
끝이 없을것 같은 올레
폭낭 아래서 잠시 앉아 나들이객은 숨을 고른다. 7차 나들이코스의 절반을 갓 넘긴 곳이다.
행원리의 이곳 용천수 이름은 모르겠다. 다만 단정히 정비된 모습과 두개의 용천수를 상징하듯 두개의 원형으로 된 조형물이 반긴다.
무심한 듯 아무런 안내판도 없는 행원 용천수를 지나 어등포로 걸음을 뗀다.
■어등포
행원의 옛 지명인 어등포는 제주도 북쪽에 있는 다섯 개의 연륙 포구 중 하나였다. 또한, 그 당시 별방 방호소 소속 전선 1척과 함께 병선도 감출 수 있다고 하였으니 꽤 큰 포구였던 셈이다.
광해군이 유배를 온 곳이라 해서 어등포라 불렸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틀린 듯 하다. 제주에 올 때 이미 임금이 아닌 죄인 신분으로 왔고 지금까지 복권도 되지 않아 군(君)으로 불리는 신분인데 누가 감히 임금 어(御)를 쓸 수 있었겠는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는 강화도로 유배되어 아들 내외의 비참한 죽음을 보았고, 삼전도의 굴욕적인 소식도 들었을 것이다. 그 때 광해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어쩌면 중립외교를 펼치며 후금(이후 청나라)과 화친을 했던 터라 청에 의한 복권의 희망도 가졌을 듯 하다. 그러나 인조는 삼전도 굴욕이 있고난 직후 그 해인 1637년에 돌연 광해를 제주로 유배 보낸다. 인조도 그러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일까. 광해는 1641년 끝내 절해고도 제주에서 한 많은 67년의 생을 마감한다.
이증(李增)의 남사일록(南槎日錄) (1679년)에서는 어등포(於等浦)로 표기되어 있고, 신광수의 탐라록(耽羅錄)(1764년)에는 ‘어등포(魚登浦)의 저녁 모습’은 제주 8경(濟州八景)의 하나라고 하여 어등포(魚登浦)로 표기하고 있다.
어찌됐건 어등개라고 불리던 지명을 한자 차음한 것이 어등포인 셈이다. 애향심의 발로에서 나온 이야기에 찬물을 끼얹은건 아닌지 괜한 걱정을 한다. 포털 싸이트 지도 검색에는 어등포를 검색하면 식당이름만 나오는데 이부터 고쳐야할 일이다. 구좌읍 방파제로 검색해야 어등포가 나오니까 말이다.
■월정리 마을 안길
어등포를 뒤로 하고 출발지점으로 향한다. 세찬 바닷바람을 마주하고 걸으니 발걸음도 무겁고, 얼굴이 소금 범벅인듯 짠내가 물씬 묻어난다.
서둘러 관광객들과 차들이 뒤엉킨 월정리 해변을 지나 다시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바람이 확실히 덜하다.
마을 안길 입구
맞은편 가게 좌측으로
리모델링된 구가가 멋있다
마을 안길에서 마주한 한옥-숙박시설인듯
■월정리 해신당
해신당으로 향하던 길에 거센바람을 마주보고 낚시하는 이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팔뚝만한 숭어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다. 제주에선 해안가의 수심이 낮아서, 바람이 세고 파도가 많이 치는 날 큰 고기가 올라 온다던데 그 말이 맞는듯 하다. 초보낚시꾼인 나들이객은 엄두도 못 낼 날씨에 역시 꾼은 꾼이다.
월정리 해신당은 벨롱개 해신당이라고도 한다.
정월 또는 2월에 마을제와 같이 제를 지낸다고 하며 개인 치성은 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바다가 삶 터였던 제주에서는 해상의 일들을 관장하는 해신은 절대적이다. 옛 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곳에서 제를 지내며 해상의 안전과 풍어를 간절히 기원했다.
마을에 따라서는 마을 전체의 수호신을 모시는 본향당과는 별도로 해신당 계통의 당이 따로 있는 곳도 있고, 또 본향당이 따로 있지 않고 해신당 계통의 당신을 마을 전체의 본향당신으로 모시는 마을들도 있다고 하는데 월정리는 김녕과 마찬가지로 본향당이 따로 있다.
월정리 해안에도 어김없이 환해장성과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자꾸만 훼손되어져가는 환해장성의 체계적인 보호가 절실하다.
약 10km여의 나들이의 끝에 출발지로 복귀했다.
서걱거리며 귓속에 들어온 모래를 새끼손가락으로 털어내면서 월정리에선 용암동굴이나 내 귓속이나 바람이 실어온 모래에 영향을 받는건 매한가지구나 생각했는데 실없다.
바람 많이 부는 날 월정리는 귀마개라도 해야할 일이다.
● 지금까지 제주역사나들이 7차 탐방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