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북촌 탐방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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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탐방코스는 북촌 일대이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에서 출발하여 서우봉 몬주기알/일제동굴진지ㅡ북촌환해장성ㅡ가릿당/등명대ㅡ북촌포구ㅡ사원이물ㅡ꿩동산ㅡ북촌선사주거유적지ㅡ포제단 ㅡ마당궤ㅡ당팟ㅡ북촌초ㅡ순이삼촌문학비ㅡ애기무덤 을 거쳐 4.3기념관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북촌 4.3길 코스에서 낸시빌레는 동선상 동떨어져 있어 생략.
■북촌리
북촌리는 본동과 해동, 억수동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으로는 서우봉을 경계로 함덕리와 면하고 있으며 북촌 앞바다에는 제주비경 31선에 선정된 다려도가 아름답게 누워 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
4.3당시 북촌에서 300명이 넘는 무고한 주민들이 한 날에 어처구니 없게 토벌대에 희생당한 비극의 현장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4.3 에 대한 정명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지만 그 어떤 이름으로도 고귀한 생명의 가치를 넘어설 수는 없다. 북촌에서의 학살사건은 토벌과정에서 일어난 최대의 비극이다. 이데올로기가 대립되던 시대적 상황이 왜 하필 우리 제주에 이토록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추모하면서 잠시 무거운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북촌리에서는 2016년말에 북촌리 일대에 4.3길 코스를 조성하였다. 4.3유적을 둘러보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어 4.3을 되새기며 걸을 수 있다. 동광리와 의귀리에 이어 세번째로 조성된 4.3길이다.
■서우봉 일대 몬주기알
서우봉 하단 바닷가에 면한 절벽을 몬주기알이라 한다. 이 절벽에 있는 자연 동굴에는 4.3당시 북촌,함덕 주민이 피신해 있기도 했다.
토벌이 최고조에 이르렀을때 선흘리 목시물굴에서 살아남은 여성과 아이들은 함덕 2연대 3대대 본부로 끌려와 수용됐다. 이들 중 일부인 여성 26명이 1948년 12월 26일 이 곳 몬주기알에서 토벌대에 의해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일제 동굴진지
서우봉 중턱 일제 동굴진지 이정표
제주 서우봉 일제 동굴진지는 오름 사면의 해안 절벽을 따라 23기가 있으며, 이 중 19기의 진지가 확인 가능한데,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어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해안에 직접 면한 동굴진지도 있고, 산 중턱에 있는 진지들도 있다.
일제 말기 일제는 미국의 일본 본토 진출을 막기 위한 '결7호 작전'을 준비하고 제주 곳곳에 이러한 진지를 구축하였다. 만일 원자폭탄에 의한 일본의 항복이 아니었다면, 우리 제주는 오키나와처럼 수십만이 전쟁통에 희생되는 비극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때의 참혹한 수탈과 제주도내 곳곳에 이러한 진지를 구축하기 위한 강제동원에 고통 받았던 우리 제주인의 아픔의 역사를 잊으면 안될 것이다.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는 이러한 고통의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또다른 갈등 상황이 빚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깊이 반성하고 깨달아야 할 때이다.
■검섯개물
(검섯개물은 북촌서길 북촌리 해동이란 표석이 세워진 검섯개에 있는 산물이다. 서모오름 동쪽 동네인 ‘해동(옛 이름 해뎅이)’의 식수였다. 어로시설인 검섯개는 해수면 아래 바다 바닥이 용암으로 덮여 있어 검게 보이는 서쪽에 있는 포구란 의미이다. 이 산물도 두 개의 원형 시멘트 식수통을 갖고 있으며 여자 전용으로 사용했다.)-출처 제주의 소리.고병련
조천등지의 산물과 달리 북촌의 산물터에는 두개의 원형 우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여자전용의 경우이다. 원형벽이 높게 쳐진 곳은 아마도 밀물때에도 바닷물이 들어가지 않도록하는 의도인것 같다. 조형적인 면에서 꽤 조화가 있으면서 미려하다.
썰물때라서 그런지 수량이 빈약하다. 주변 환경의 변화가 수량에 영향을 미친듯 하여 아쉽다.
■북촌 환해장성
북촌의 환해장성은 약 250미터 정도 남아 있으나 많이 훼손되어 원형으로 보기엔 빈약하다. 그러나 아직도 장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고맙다. 제주도 기념물 49-5호로 지정되어있다.
인터넷신문 '제주의 소리'에 의하면 온평, 한동, 행원, 동복, 북촌, 애월, 삼양, 별도, 곤을동, 신산 등 10곳의 환해장성은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지만, 태흥 등 기타 지역의 환해장성은 제도적 보호장치 없이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방치되어 훼손되고 사라져가고 있는 환해장성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대책을 세워야한다.
가릿당 가는 길 중간에 35도가 넘는 여름더위에 지친 나들이객에게 시원한1,000원짜리 음료를 제공한 오아시스 같은 곳. 장사를 떠나서 주인장의 센스와 배려가 고맙다.
북촌별장이 건물규모나 안내판으로 봐서 숙박시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입구에 세워져 있는 시비의 싯귀가 마음에 와 닿는다.
그 꽃
- 고 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한창 미투(me too)로 문제가 되어 구설수에 오른 노시인의 작품이지만 작가의 도덕성 여부를 떠나서 그 내용만을 음미해 본다. 어느덧 인생의 시간이 내리막을 타고 있는 나이가 되었음을 느끼면서 그동안 못봤던 아니 인지하지 못했던 꽃들을 많이 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제주의 역사 나들이도 그동안 못 봤던 꽃중의 하나를 보는 여정임을 확신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들어가서 물어보고 싶은 강한 호기심이 생기는 곳이다.
마침 일요일이라 들어가진 못했지만 급한 생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고마왔다. 파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흰색페인트를 칠한 건물이 소박하면서도 잘 어울린다.(본관은 못 찍고 화장실만 한컷)
위 건물 마당 한켠 바다쪽에 있는 수돗가가 눈에 띈다. 요즘은 저런 수돗가를 보기가 힘든데 우리 학창시절만 해도 저런 수돗가에 줄서서 입대고 바로 마시고 씻고 했었다. 그냥 '삼다수'였다. (수도꼭지엔 수많은 잇빨 자국이 있었다)
학급 당번이 찌그러진 주전자에 물을 한가득 받아오고, 마대걸레도 빨고했던 그 수돗가이다.
요즘은 수돗물 대신 생수를 사서 마시지만 당시엔 물을 사서 마신다는건 생각지도 못했다.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해진건 맞지만 더 행복해진 건지는 글쎄다.
동네마나 유행처럼 번지는 벽화그리기 바람이 개인적으로 썩 유쾌하진 않지만 이곳의 페인트벽화는 낙서처럼 보이지 않고 제법 풍광과 어울린다. 다만 그려진 물고기떼가 민물에사는 잉어떼처럼 느껴지는건 나만의 오해인가. 방어떼를 그렸을거라고 애써 우겨본다.
모진 해풍에도 수많은 세월을 견뎠을 작은 집이 눈에 띈다. 처음엔 초가를 이고 있었을 이집에서 제주의 삶과 정경이 오롯이 느껴진다.
■다려도
섬이 수달(또는 물개)을 닮아 달여도 또는 달서도(獺嶼島 수달 獺, 섬 嶼)라고 부르는 3-4개의 작은섬과 여러 개의 여가 모여 이루어진 약 7천 500평 정도의 군도이다.
다려도 내에서 다량의 토기 파편이 발굴되었으나 팔각정 건립으로 이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탐라 초기( 기원후 500년 까지)에 아마도 어떤 기원을 목적으로 하는 장소로 신앙등 어떤 의식행위가 이뤄졌던 제사유적으로 추측한다.
일본의 후쿠오카현을 비롯한 북구주 일대에서도 다려도와 같은 제사유적의 사례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려도의 유적은 바다와 관련된 제사유적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더 이상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유물이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팔각정이 들어서면서 유물 분포지를 크게 훼손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앙의 집단 서식지로도 유명하며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풍부한 어족자원이 있는 곳으로 북촌의 대표적 명소이며 북촌리 사람들의 어릴 적 추억이 깃든 장소이다. 제주의 숨은비경 31선에 선정되어 있다.
■가릿당
가릿당은 구짓머루당이라고도 한다.
이 당의 신명은 '구지모를 노보름한집'이다. 기와집으로 조성된 제장안의 당신이며 웃손당(송당리 본향당) 금백주의 아홉째 아들이다. 자신을 홀대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마을에 풍지평파를 일으킨다. 원래 본향당의 당신들은 주로 목축을 관장하는데 바닷가 동네인 북촌에 자리 잡은 점이 특이하다.
기와집 제당 한켠에 계단식으로 조성된 제장의 당신은 구지모를 용녀부인이다. 이 당신이 북촌리 마을사람들의 생산, 물고, 호적, 피부병, 육아,해녀, 어선을 관장한다고 한다. 일렛당 신으로 음력 7일,17일, 27일이 제일이다.
와흘리 본향당의 경우 당신이 금백주의 11번째 아들이고 그 부인인 서정승따님의 제단이 따로 모셔져 있는데 비슷한 이치인 것 같다.
당신인 '구지모를 노보름한집' 이 자신을 위해서 섣달 그믐날과 정월 열나흘 날 제를 올리지만, 다른 신들도 정성껏 모시라는 당부를 한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목축신이 별로 할게 없으니 바다를 관장하는 일반 신들에게 정성을 다하라고 말하는거라 여겨진다. 실지로 북촌리에서 본향당의 당굿은 앉은굿으로 쇠퇴하였지만 잠녀들의 생업의례인 영등굿이 매년 음력 2월13일 어촌계 주관으로 열린다. 잠녀(잠수)들과 어선의 해상안전, 해산물의 풍요, 공동체의 유대강화를 기원하는 행사이다. 이 영등굿은 북촌리 마을 축제로 행해지며 마을 외부의 인사들까지 찾아와 참여한다고 한다.
■등명대(도대불)
해안선이 복잡하고 암초가 많은 제주 지역에서 전기가 보급되기 이전에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항구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던 민간 등대로 도대불 또는 등명대(燈明臺)라고 불렸다.
도대불의 어원에 대해서는 '돛대처럼 높이 켠 불'이라는 뜻의 '돛대불'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길을 밝히는(道臺) 불'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등대(燈臺)의 일본어 발음인 '도-다이'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등대는 표준어이고 '도대'는 제주도 방언이라는 설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일본어 '도-다이'에서 유래된 것이 맞는것 같다.
북촌리 도대불 윗부분 오른쪽에는 도대불을 만들 때 세운 비가 있다. 이 비의 앞면에 ‘어즉 등명대 대정4년 십이월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15년 12월에 제작되었고 ‘등명대’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도대불이라고 불렀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도대불이 제주도 여러지역에 여러가지 형태로 만들어졌지만 해풍으로 인해 부식되고 또 개발로 인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원래 북촌리 도대불 꼭대기에는 등피를 걸 수 있는 목대가 있었으나 4·3사건 당시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유리 상자를 올려놓고 카바이드 등을 넣었다. 리사무소의 급사가 어부들에게 위임을 받아 점화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북촌의 산물(용천수)
□사원이 물
북촌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이 산물은 중동 마을 입구에 있는 여성 전용의 물이다. 사원이물에는 두 개의 원형 시멘트 식수통이 놓여 있으며, 이렇게 설치한 이유는 밀물이 되어도 식수통에 바닷물인 짠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식수통이 넘치면 그 물로 음식물을 씻거나 빨래를 한 후 허드렛물(잡용수)로 사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기 위해서다.
산물은 제주4.3 이후 지역사회개발사업으로 일부 개조되었으며, 목욕을 금기하였다. 물통 안은 많은 사람들이 물허벅을 지고 이는데 편리하도록 물팡도 길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원이 물은 우리 마을의 물이라고 말하는 것 같이 글자 ‘우’ 모양을 도안해 놓은 것처럼 산물 터를 꾸며 놓았다. 돌담에 시멘트로 치장하였지만 그래도 예전의 모습을 간직 한 채 보전하고 있다. 지금은 빨래 등 생활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산지물과 가락쿳물과 사원이물은 고치 곤다(산지물과 가라쿳물과 사원이물은 같이 말한다)”고 할 정도로 자부심이 큰 달고 맑은 물이었다.(출처-제주의소리,고병련)
□도와치물
필자가 찾았을 때는 수량이 너무 적어서 아쉬웠다.
사원이물에서 바닷가 쪽인 북촌 중동 해안가를 보면 때에 따라서 식수로도 사용한 도와치물이 있다. 도와치는 마을에 중대사가 있을 때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사용하는 집(일종의 공회당 혹은 마을회관)인 도갓집으로, 이 근처에서 나는 산물이란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출처-제주의 소리,고병련)
실지로 위의 그림자료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볼때 도갓집(도와칩)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그림에 가릿당과 등명대도 보인다)
□고망물
사원이물 동쪽 곁에 고냥(구멍의 제주어로 고망도 같은 뜻)에서 나오는 산물을 고망물이라고 한다. 이 산물에 물줄기가 올라와 그 물로 눈을 씻으면 눈병이 낫는다고 알려진 물이다. 아마도 이 물은 바닷물과 섞여 용출하기 때문에 염분기가 많아서 눈병이 잘 나았던 것으로 짐작된다.(출처-제주의 소리,고병련)
■꿩동산
1949년 2월4일 2연대 11중대 병력 20명이 트럭을 타고 함덕 대대본부로 향하던 중 이 곳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고 15명이 전사, 2명 부상, 경찰 및 민간인 1명사망하고, 무장대 1명이 사망했던 장소이다.
최근에 이 꿩동산에 꽃길이 조성되어 있다. 4.3의 아픈 기억에서 평화와 상생의 염원을 담아 희생자를 추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꽃길 주변으로 바람개비가 아팠던 세월을 흘려보내는 듯 돌아간다.
■낸시빌레
냉이가 많이 난다고 해서 낸시빌레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다.청년 24명이 국회의원 총선거 불참을 이유로 1948년 12월 16일 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곳이라고 한다.
당시 무장대에 협조 여부와 관계없이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선무공작으로 마을 주변 사람들과 민보단원등 400여명이 함덕에 주둔한 2연대로 갔는데 이 중 5.10 선거에 불참한 청년들을 이 곳에서 처형한 것이다.
낸시빌레로가는 이정표를 따라가다 찾을 수 없어서 포기. 더운 날씨도 그렇거니와 좀 더 충실한 이정표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북촌 선사주거 유적지
신석기 후기 유적인 북촌 바위그늘 유적지이다. 속칭 '고두기 엉덕'이다.
'엉' 혹은 '엉덕'은 제주어로서 화산으로 형성된 거대한 바위의 밑부분이 떨어져 나가 마치 깊지 않은 동굴과 비슷한 형상을 이룬 지형을 말한다.
1973년에 발견되었고, 1986년에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발견된 조개껍질을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약 3000년전 즉 기원전 1000년대로 나왔다.
이곳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은 삼각점렬문 토기, 이중구연 토기(겹아 가리토기), 골각기, 불에 탄 산야초 열매등이 있다. 신석기 시대의 채집과 수렵생활의 흔적임을 잘 보여준다.
■포제단
정월 초하룻날 고사를 지내 마을의 안녕과 풍어,풍농을 기원하던 곳이다.
■마당궤
1946년 6월 북촌에서의 2명의 경찰관 피살 사건에 연루되었던 9명의 북촌 청년들이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연행되었던 장소이다. 이들은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고 안다.
■정지퐁낭 기념비/당팟
안내판
이 곳은 800년된 폭낭(팽나무)이 있어 정자역할을 했었는데 59년 사라호 태풍당시 쓰러져 다시 심고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 폭낭 옆에는 관리들의 선정비들이 있는데 4.3당시 총탄의 흔적을 담고 있다.
당팟은 1949년 1월 17일 북촌초등학교 학살사건 때 서쪽의 너븐숭이와 더불어 주민 100여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은 곳이다.
■북촌초등학교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마을 사람들을 모이게한 장소이다. 이 곳에서 일어난 생과 사가 갈리는 끔찍한 비극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 다.
북촌초등학교는 1943년 6월 10월 조천 동공립학교로 개교하였다가 1945년 9월 1일 북촌 공립국민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북촌 공립국민학교는 1949년 2월 10일 4·3사건으로 폐교되었다가 1953년 4월 9일 북촌 국민학교로 승격 개교하였다.
■순이삼촌 문학비
"그 시간이면 이 집 저 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곤 했다.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 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성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5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순이삼촌' 중)
북촌리와 4.3의 비극을 표현한 현기영님의 소설 '순이 삼촌의 일부이다.
소설 '순이 삼촌'은
'1978년에 발표된 현기영의 중편 소설로, 본격적인 4·3문학의 시발이자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현기영은 ‘북촌리 학살 사건’을 취재하고 그것을 기본 틀로 삼아 소설을 창작하였다. 작품 속에서는 북촌이 아니라 서촌으로 나온다. ‘순이 삼촌’은 현기영의 첫 창작집 이름이기도 하다.'
'억울한 양민 학살의 형상화를 통해 오랫동안 잊혀지기를 강요당해왔던 제주 4·3의 비극적 역사를 사회적으로 인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작품이다. 금기의 현대사를 문제 삼은 「순이 삼촌」에서 작가는 작중 인물의 입을 빌어 제주도 민중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이제 당당히 증언해야 할 때임을 역설하였다. 본격적인 4·3문학의 물꼬를 튼 작품으로서 의의가 크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비석들이 세워져 있지 않고 뉘여 있는 것은 당시 총탄에 쓰러져 있는 주민들의 아픔을 형상화 한것이라 한다. 마음이 숙연해지고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져 옴을 느낀다. 해방된지 얼마 안되는 시기에 우리는 4.3이라는 비극을 또 6.25라는 동족상잔의 큰 아픔을 겪었다. 또한 이 시기에 발생된 아픈 기억이 아직까지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모두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한테 있어서 이념과 신념이라는 굴레가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애기 돌무덤
이 곳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아는 슬픈 장소이다. 곳곳에 애기들을 위한 장난감과 학용품들이 어린 넋들을 위로하고 있다.
- 꽃봉오리 조차 채 생기지 않았던 나이에 억울하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던 어린 영혼들을 감히 위로해 봅니다 -
숙연한 심정으로 북촌리 마을 걷기의 여정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