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 조천 탐방코스
페이지 정보
#대섬#죽도#조천#관곶#제주항일운동#제주역사#연북정#조천진성#금대#제주역사#제주여행
제주역사나들이 4차 탐방코스입니다.
(신촌ㅡ조천)을 걸으면서 제주의 살아있는 역사와 아름다운 풍광을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
신촌대섬(죽도)ㅡ조천마을입구ㅡ절간물ㅡ수룩물ㅡ엉물ㅡ김연배생가ㅡ황씨종손가옥ㅡ전통초가및골목길ㅡ드라마'맨도롱또똣'촬영지ㅡ도릿물ㅡ양진사ㅡ이기풍목사집(?)터ㅡ조천비석거리ㅡ조천야학당터ㅡ황진식생가터ㅡ조천관ㅡ금대ㅡ연북정(조천진성)ㅡ돈지물ㅡ조천연대ㅡ왜포연대ㅡ관곶ㅡ해녀불턱ㅡ신흥리방사탑ㅡ제주항일기념관ㅡ조천극장ㅡ조천지서ㅡ조천중학원터로 이어지는 코스입니다.
■ 신촌 대섬(죽도竹島)
조천과 신촌리의 경계에 있는 대섬은 ‘점성이 낮아 넓은 지역으로 퍼지면서 흘러내린 용암류(파호이호이용암류)가 표면만 살짝 굳어져 평평하게(투뮬러스) 만들어진 지형이 특징으로 제주도 내에서 지질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 써놓았다. 섬 때문에 막힌 바다가 호수처럼 보이고, 그 속에 파래 같은 해초가 번성해 지저분해 보인다.(제주일보 김창집)
몇년 전만해도 섬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었으나 지금은 추가매립을 해서 도로를 넓게 만들었다.
대섬은 섬 전체가 1970년대부터 학교법인 한양재단 소유 토지로 되어있다. 한양재단에서 어떤 경유로 대섬을 취득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곳이 사유지라는 사실에 왠지 아쉬워진다. 예전에는 해안을 경계하는 전투경찰 초소와 막사가 있었다.
대섬에선 신촌과 조천이 두루 보인다.
대섬은 탐라순력도 조천조점(朝天操點)에서도 두개의 섬으로 죽도(竹島)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형상목사 일행의 행차가 죽도 앞을 지나 조천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대섬과 조천을 이어주는 길은 바다 한가운데에 나 있어 멋진 풍광을 보여주지만 이 길로 인해 호수처럼 막혀버린 바다가 생명력을 잃고 있어 안타깝다.
■조천마을 입구
대섬을 건너 조천으로 들어서면 돌담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우영밭이 보인다. 작은 밭이지만 해풍으로부터 작물을 보호하려는 모습이 척박했던 환경을 극복하고자 했던 우리네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절간물
대섬을 지나 조천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용천수인 '절간물'이 보인다.
절간물
절간물의 용천수(산물)
썰물이라 용천수가 제법 풍성하게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활기차다. 산물이 지금도 이렇게 뿜어져 나오고 관리상태도 양호한것 같다.
조천에 살던 옛 분들의 추억이 다분히 담겨있다.
'절간물'의 명칭은 근처에 절이 있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절간물과 불과 3미터 떨어진 이 오래된 가옥의 쪽문이 말해주듯 혹시 이 가옥이 예전엔 절간(절)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유교윤리를 강조하며 '당오백 절오백'이었던 제주의 모든 사찰과 당을 없에버린 이형상목사가 조천조점을 하러 이 곳을 지나면서 이 절은 없에버려 절간물만 남은건 아닌지 상상을 해본다.
1914년 지적자료를 찾아보니 이 집이 조천해안에서 제일 서쪽에 위치했던 집이다.
이 집에서 대섬 방향의 집들은 매립 후 생긴 집임을 알 수 있다.
■수룩물, 엉물
조천은 삼양,신촌과 더불어 마을 곳곳에 용천수(산물)가 풍부하다. 삼양에 선사인의 집단주거지 유적지가 발견되듯이 오래전부터 용천수가 풍부한 곳에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촌락을 이루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물이 귀했던 우리 제주에서는 용천수 즉 산물이 곧 삶의 물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마음이 담긴 수룩물(수덕물)
엉물은 지금도 맑고 수량이 풍부해 한여름에 꼭 몸을 담그고픈 마음이 가득하다.
동네마다의 용천수(산물)를 볼 때마다 알 수 있는 공통점은 거의 남녀용이 구분되어져 있고(당연하지만), 보다 수량이 풍부한 큰물이 여자용이고 또한 식수원으로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조천의 김해김씨집안
조천포구는 예로부터 화북포구와 더불어 제주와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해상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한 집안도 나타났다고 한다. 또한 이 포구를 오가는 관리들이나 유배객을 통해서 육지의 성리학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어 학문적으로도 많이 깨어 있었으며 관직에도 많이 진출하게된다. 이 중 조천의 김해김씨 문중이 지역의 유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해김씨 집안은 조천 뿐만 아니라 제주 지역의 영향력 있는 가문으로 조선말기 민란을 진압하던 핵심세력으로 알려진다. 1898년 '방성칠의 난'때 제주군수는 이 집안 김희주이며 '김응빈'을 중심으로 진압군인 창의소를 결성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일제의 지배로 이 집안은 기득권이 약해지나 그 자제들은 일찌감치 서울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때 유학갔던 이들이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되고 특히 일본으로 유학갔던 이들은 당시 일본에서 지식인 층에서 유행했던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항일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갖추어 항일세력으로 발전하게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이고 초대 논설위원이었던 김명식, 오사카 노동운동의 대부 김문준, 일본에서 활약한 여성노동운동가 김시숙, 독립자금 모금운동을 한 김운배, 제주3.1운동의 시발을 제공한 당시 휘문고생 김장환, 광주항일 학생운동의 김시성과 김시황, 공산주의 항일 운동을 했던 김시용등이다.
■김연배(김년배)생가
김연배는 일제강점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 이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김연배는 3월 23일과 24일 3,4차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4차 시위 때 김연배 등 4명이 체포됨으로써 만세 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김연배는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이 확정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1919년 12월 12일 가출옥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23년 28세로 요절하였다.
199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황씨 종손가옥(황인관가옥)
황인관 가옥은 안거리 4칸, 밖거리 3칸, 목거리 4칸, 이문간으로 이루어진 기와집이다.
(1978 제주도민속자료 제4-5호)
제주에선 민가의 기와집은 희소하다. 이러한 기와집은 제주 재래의 민가 배치를 기본으로하여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주로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 애월진, 화북진, 조천진 등 중요지역 취락지구에서 많이 지어졌다.
■전통초가와 돌담길
비록 짧은 구간의 골목길이지만 그 어떤 인위적인 조경보다도 제주 고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올레길 18코스에 포함되기도 하는 이 길이 부디 없어지지 않고 원형 그대로 간직되어지길 바래본다. 원래 이 길은 이 집의 대문앞을 지나 집담이 끝나는 부분이 바다에 접한 막다른 올레였다.
하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네에서 꽤 잘사는 집이었을 것이다.
옛집을 개조하여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장의 센스가 돋보인다.
■ 드라마 '맨도롱또똣' 촬영지
2015년 방영된 드라마 촬영장소이다. 이 드라마의 주요 배경은 한담해변 봄날 카페이다. 그러나 주인공 강소라가 제주살이 집으로 사기당해 계약한 장소로서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TV속 드라마에서 낯익은 장소가 나오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도릿물
돌담으로 둘러쌓인 진입로가 일품이다.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막상 산물의 관리상태는 좀 아쉽다. 안내표지판에 도릿물에 대한 설명이 있으면 좋을듯 하다.
■양진사(養眞寺)
현재의 대웅전은 2016년에 낙성식을 하였다.
바다를 매립한 곳에 사찰이 들어서 있고 바다와 같은 부처의 넓은 마음이 불자의 가슴에 젖어드는 도량이다.
1921년에 창건된 이 사찰은 신도들이 파도소리와 어우러진 법음을 들으며 기도함을 더없은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
■이기풍 목사 집(? 또는 교회)터
이기풍목사는 1908년 제주에 입도하여 본격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개신교를 전파한 인물이다. 당시 제주에 유배중이던 철종의 부마 박영효의 도움(당시 100원기부)으로 제주읍 서문근처의 출신청을 매입하고 성내교회를 건립한다.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기록에는 1908년 금성리교회, 1909년 조천리교회, 1910년 성내교회 설립의 기록이 나온다.
현재의 조천장로교회는 1980년도에 지금 위치에 들어섰는데, 1914년도 지적도를 보면 이기풍 명의의 대지가 나온다.
<조천읍 역사문화지,2011,제주특별자치도>에 의하면 조천출신의 신자 천아나라는 분이 1908년 이기풍 목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전도에 힘쓰던 중, 1909년에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의 자택을 예배당으로 헌납하여 조천교회의 역사가 시작되게 한 인물이라고 한다.
자식을 못 낳는다고 두번이나 소박을 당하고, 온갖 궂은 일을 하며 고단하게 살아가던 중 57세때 이목사의 선교로 종교의 품에서 삶의 위안을 맞이했다고 한다. 천아나는 자신의 자택을 예배당으로 헌납하는데 이 집이 조천리교회의 시작이며, 조천을 떠나 성읍에 와서 다시 자신의 집을 또 헌납하는데 이 곳이 성읍교회의 기틀이다. 또한 법환교회의 개척에도 간여했다. 1921년에 조천으로 귀향하여 교회일을 보다가 1930년에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2441번지는 원래 천아나 소유의 자택이었으며 교회에 헌납하여 소유주가 목사인 이기풍으로 기록되어진 것이 확실해 보인다.
1909년에 조천리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이 처음의 조천리교회 자리일 것으로 추정해 본다. 지금의 양진사 바로 맞은편인데, 1914년 당시에는 양진사가 있는 땅이 바다(해안 암석지대)였었고, 이 대지가 바로 바다에 면해 있었다.
■관청터(조천리 경로당)
지금은 조천리의 경로당으로 사용되고있는 관청터이다.
탐라순력도의 조천조점에 보면 연북정 좌측상단에 기와집이 보인다. 그림의 위치로 보아 이 곳임을 확신하는 이유는 1914년 지적도에 이곳이 '청(관청)'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이다. 이 곳에서 조천포구를 드나드는 모든 행정적 지원업무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조천비석거리
화북포구와 더불어 제주와 육지를 잇는 관문이었던 조천포구 역시 부임이나 이임했던 관리들의 공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곳의 비석들은 유난히 공을 들여 모두 비각안에 세워져 있다.
이 곳에도 선정을 베푼 관리의 비도 있지만 목사 이의식 같이 <탐라기년>의 1847년 기록에서 보듯 '탐욕하고 포악하며 엄하고 혹독하기로 백성이 범과 같이 미워했다'고 되어 있는 이도 있다. 폭정을 휘두른 이도 진정 자신은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비석거리가 있다는 그 자체로 의미를 두어 본다.
비석거리의 7개 비석 중 이원달 목사와 백희수목사의 비는 화북 비석거리에도 있다.
■조천 야학당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에 세워져 문맹퇴치 및 청소년들에게 항일정신을 심어주었던 곳이다. 지금은 2009년에 제주도의 지원과 마을기금을 보태어 옛 야학당터에 건물을 신축하여 야학당 관련 전시와 문화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황진식 생가 터
3.1운동 당시 조천만세운동의 주역이었던 14인의 조천청년 중의 하나였던 황진식의 생가터이다.
■조천관
조천리의 본 지명이 '조천관리'이다. 그러다가 1700년대에 '관'이 빠지고 '조천'으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원래의 조천관은 조천진 안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 표지석이 있는 조천관은 그 이후 조선말기에 객사로 쓰던 곳이다.
지금은 개인의 소유라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 아쉽다.
■금대
일제강점기 한학자이며 우국지사 김명식의 형인 김형식이 당시 유림의 거두였던 '김시우'를 기리면서 그의 집 앞 작은 동산에 김시우 아들 김윤환과 함께 1925년에 세운 비석이다.
조천의 3.1만세 운동이 김시우의 소상때 시작되었는데 조천만세운동 6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금대의 '금'자는 비파 금 인데 비가 서있는 이 작은 동산이 비파와 같이 생겼다고해서 '금산'이라 부르던 것에 기인한다. 글씨는 조천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김유배가 썼고, 비문의 시는 김형식이 지었다.
조천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유적이다.
■옛 정미소
4.3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4.3당시 소개령이 내려졌던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해안가 마을인 조천이나 함덕등지에 많이 내려와 있었는데 일가족 중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고 하여 이곳에 수용되었다. 해안가 마을의 도피자 가족이라고 지명된 사람들도 수용되었는데 49년 1월과 2월에 걸쳐 도피자가족 90명이 조천지서 앞에서 총살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
무고한 생명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져간 아픈 역사앞에 우리가 해야할 일들을 생각하며 잠시 숙연해진다.
■연북정 및 조천진성
연북정은 잘 아다시피 조선시대 제주의 관문이던 조천포구에 객사로 쓰였다고 전해지는 건물이다.
연북정은 일제 강점기때 일제의 주재소로도 사용되었었다.
연북정이 객사로 쓰였다고 하는데 필자는 객사의 기능보단 방어진지의 주요 지휘소 기능을 담당하던 건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50년대까지만 해도 연북정은 실내로 들어가는 출입구와 벽체가 있었고, 창문이 있었던 개구부가 여실히 보인다. 즉 실질적으로 활용한 건물의 구조가 확연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71년에 보수된 연북정도 상부의 벽체와 인방이 없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건축물로서 기능을 했음을 알 수 있는 벽체가 남아 있다. 다만 50년대와는 달리 연북정으로 오르는 계단의 위치가 바뀌었다.
지금의 복원된 연북정을 보면서 아쉬운점이 많다.
벽체는 온데간데 없고 휑하니 기둥만 남아 커다란 정자를 연상케 할 뿐이다. 또한 지붕도 물매가 하늘로 치솟듯이 지나치게 세련되어 있다. 한국 전통 건축양식을 잘 모르지만 현재 연북정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보인다.
연북정이 단순히 날씨 좋은날 바람쐬듯 잠시 올라가 임금님 생각하고 시 한 수 읊고 내려오던 그런 낭비적인 공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호사가들의 말대로 귀향 온 유배객들이 임금을 그리며 북쪽을 바라본다고 이름을 붙인 연북정은 더 더욱 아니다. 감히 죄인의 입장에서 제주의 주요 진지의 공무를 담당하던 건물에 사사로이 드나들 수 없었을 것이다.
복원된 지금의 모습은 마치 살점은 떨어지고 뼈대만 앙상히 남은 형상을 보고 있는 듯하여 마음이 좋지 않다. 하긴 지금의 관덕정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조천조점에 그려진 연북정에 오르는 계단
탐라순력도의 조천조점에 그려진 연북정에 오르는 계단은 조천진성 내부에서 오르게 되어있다. 50년대 사진에서는 진성 입구우측에서 오르게 되어 있고, 70년대 이후 부터는 지금의 위치 즉 탐라순력도에서의 위치와 정 반대로 되어있다. 문화재 복원의 개념이 어떤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외한의 입장에서 볼때에도 기록에 의한 고증이 기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시설이라면 출입구도 당연히 성내에 있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조천진성은 제주의 3성(제주읍성,정의읍성,대정읍성)9진 중 규모가 제일 작다고 한다. 진성내에는 탐라순력도에서 보듯 여러개의 시설들이 보이나 지금은 흔적도 없고, 무슨 보수를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진성내에 검은 비닐포장만 씌위져 있다. 조천진성의 원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것에 대한 그리움과 자부심의 발걸음이 지속될 수 있도록 관리되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돈지물
돈지물 남탕
'돈지'라는 말은 제주어로 포구라고 지난 번에 소개한 바 있다. 뉘앙스는 포구와는 조금 다르지만 해안가에 면한 바위해안이라고 이해하면 맞을 듯하다. 조천진성에 가장 인접한 산물로서 중요한 생활용수 및 식수의 공급처였을 것이다. 돈지물의 여탕(여탕이라기 보다는 여자용)이 잘 정비되어 있고 수량도 풍부하다.
■조천연대(관곶연대)
탐라순력도에 관곶연대라고 표기된 연대이다. 조선시대에는 25개의 봉수(봉수대, 오름의 정상에 설치)와 38개의 연대(봉수와 봉수를 잇는 역할이고 해안의 구릉지대에 설치)가 있었다. 조천연대는 서쪽으로는 원당봉수와 동쪽(정확히는 동북)으로는 왜포연대를 잇는 연대이다. 연대를 담당하던 이가 18명이라한다. 이곳 역시 기록보다 두배이상 크게 복원(?)되어 있다. 연대는 가로세로 10척이라는 기록의 두배 이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연대가 있었던 위치에 만들어진 조형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곶
이곳의 지명은 조천관의 '관'에서 유래한다. 탐라순력도의 조천조점에 관곶연대라는 표기가 있듯 지명의 유래는 확실해 보인다.
이 표지판은 정작 관곶으로 가는 길 중간에 세워져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가야 관곶이 나온다.
보이는 등대에서 바닷가로 내려간 곳이 관곶이다.
관곶은 제주도에서 해남과 가장 가까운거리에 위치한다. 옛날의 열악한 해상운송 여건을 생각해보면 육지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배를 대려 했을 것이다. 조천포구가 제주의 관문이 된 것도 그러한 지리적인 근접성이 반영이 됐으리라 짐작한다.
■왜포연대
왜포는 '왯개'라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개'는 포구라는 뜻의 제주어이고 왯개를 한자음 차용한 것이 왜포이다.
남서쪽으로 조천연대(관곶연대)와 동쪽으로는 함덕연대와 교신하던 곳이다. 왜포연대는 다른 연대들과 달리 타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연대로서 가치가 높다. 접근로가 달리 없어 경작지 옆을 조심히 지나야 만날 수 있는 점이 아쉽다.
■신흥리 해녀불턱
해녀불턱은 해녀들이 물질 전후 모닥불을 피우고 언몸을 녹이던 장소이다. 지금의 마을 해녀탈의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해녀불턱 전경
안쪽에 해신제단을 놓고 물질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기도 했다.
■신흥리 방사탑
방사탑은 '거욱', '거욱대'등으로도 불리는데 사악한 기운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려는 마음에 세워진 조형물로서 제주 도내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신흥리 2호 방사탑은 탑 머리에 새머리형상의 돌을 놓아 돌출된 형태라서 '양탑'이라 한다.
신흥리 1호 방사탑은 밀물때는 하부가 잠긴다. 상부에는 50cm정도 움푹 파여있어 '음탑'이라고 한다.
■헤엄치는 해녀상
방사탑 1호 옆에 위치한 해녀상
물속에서의 갑갑했던 물질을 벗어나 하늘을 날아보시라는 의미로 사진각도를 잡아봤다.
하늘이든 바다든 파란건 매한가지이니까.
■제주항일운동 기념관
제주항일운동기념관
제주 항일운동은 조천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는데 그 이유는 기존의 지식층과, 육지부 또는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배운 청년들이 많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조천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당시 휘문고 재학생이던 김장환이 서울에서의 3.1운동 후 독립선언서 사본을 들고 피신차 제주에 와서 숙부인 김시범, 김시은과 협의하여 11인의 동지를 규합하고 김시우의 소상날인 3월21일에 미밋동산(지금의 만세동산)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3월24일까지 4차에걸쳐 운동이 이루어졌고 주동자 14명이 전원 검거되며 일단락된다. 이 운동으로 29명이 기소되어 이 중 23명이 실형을 선고 받는다.
(위 사진에서 뒷줄 왼쪽으로 두번째 분이 김시범 선생)
조천에서 시작된 제주 3.1운동은 이후 민족해방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제주출신의 인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제주지역에서 민족교육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조천극장(동방극장)
동방극장으로 개명하여 1971년까지 운영되었던 조천극장 건물이다. 이 건물터는 4.3때 조천지서 앞에 위치하고 있어서 소위 도피자 가족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가슴 아픈 장소이다. 제주읍내의 현대극장과 더불어 근대 건축유산으로 보호가 시급해 보인다.
■조천중학원 터
조천중학원은 1946년3월에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설립이 된다. 당시 5개 학급에 2개 학년 200여명이 공부했다고 하니 꽤 큰 규모의 교육시설이었다. 4.3당시 김달삼의 뒤를 이은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가 당시 사회와 체육을 담당하던 교사였다.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한 교사들은 친일파 척결을 위한 민족주의적 성향을가지고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좌익활동에 가담되어지며 4.3발생 이후 대부분 희생된다.
1947년 3.1기념집회 이후 미군정의 감시와 체포, 구금으로 정상적인 수업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입산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며, 48년 2월 조천지서에 구금되었던 조천중학원생 김용철이 고문치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처음엔 미군정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양심적인 의사 장시영에 의해 고문치사로 밝혀진다.
1948년 5월 9일자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결국 김용철을 고문치사케 한 사건에 대한 군정재판에서 관련 경찰관 5명 전원은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48년 5.10선거 이후 조천중학원은 미군정에 의해 폐원조치 되었다.
■조천지서(현 조천지구대)
1948년 4.3당일 무장대에 의해 습격당했던 경찰지서중의 한 곳이다. 4.3 당시 이곳을 통해 벌어졌던 수많은 아픔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
4.3의 아픔에 대하여 숙연해지는 역사의 한 공간이다.
조천-신흥 구간은 생각할 것도 볼것도 많은 길이다. 걸으면서 제주의 역사와 풍광, 삶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 한번쯤 가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