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신촌 삼양-신촌 탐방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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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동 선사유적지에서 출발하여 강운봉가옥-삼양해수욕장-가름포구-문강사-불탑사-닥모루-신촌포구-신촌큰물-신촌향사-조규창가옥-신촌초등학교앞으로 이어지는 코스이다.
■ 삼양동 선사유적지
제주시 삼양동에 위치한 선사유적지이다.
'청동기~초기 철기시대의 해안마을. 평탄한 대지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유적으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후기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인 동시에 제주지역 송국리형 주거문화 수용단계(기원전5~1세기)의 취락 흐름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임이 인정되어 지난 1999년 11월 15일 사적 제416호로 지정되었다' 라고 소개되어 있다.
유적지 입구 안내판에는 '기원전,후 1세기경을 중심으로 한 시기의 집자리 230여기가 확인된 대단위 마을 유적이다'라고 안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고학에서는 유물,유구,유적이라는 용어로 과거의 흔적들을 구분한다. 유물은 형태가 작아 운반이 가능한 석기,토기,금속기등을 의미하며, 유구는 대지위에 구축되어 움직일 수 없는 잔존물이라고 편의상 구분한다. 즉 유구는 집터, 무덤터등을 의미한다.
유적은 형태가 크며 위치를 변경시킬 수 없는 조개무지,무덤,주거지등을 가리킨다.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유물과 유구가 발견된 주거지이기 때문에 이를 아울러서 유적지로 지정 되었다.
삼양동 선사유적지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은 곧은 아.가리토기, 점토띠토기,삼양식토기 등이 있다. 특히 삼양식 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민무늬토기와 유사하나 더욱 발전된 제주식토기라 한다.
생활도구로는 석기인 돌도끼, 돌화살촉,갈판,공이,돌검,돌팔찌,청동검,옥팔찌등이 출토되었으며 청동검이나 옥제 장신구등은 육지인 한반도와의 교류를 보여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사시대 구분은
신석기시대 BC 5,000~1,000년
청동기시대 BC 1,000~300년
철기시대 BC 300년 이후로 구분한다.
청동기와 신석기의 차이 구분은 토기의 모양에 있다. 신석기 시대는 빗살무늬 토기로 대변되며, 청동기 시대는 무문토기로서 바닥이 납작한 것이 특징이다. 삼양동에서 출토된 토기가 전형적인 청동기시대의 토기임을 보여준다.
청동기시대는 석기와 청동기를 같이 사용한 시대이며, 신석기시대와 구분되어지는 특징은 벼농사등 농사에 의한 농업공동체의 확립이다.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삼양동 선사유적지에 대한 안내 내용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물론 전문가들의 의견이 맞겠지만 유적지 안내문에서는 기원전,후 1세기경 유적이라하는데 그 시기는 이미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보급된지 200~300년이 지난 시기이다. 따라서 청동검등 한반도와의 교류를 통한 유물들이 출토 되었다면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기원전 300년 이전의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감안해서 문화가 늦게 보급되었다 하더라도 안내문에 소개된 기원전후 시대는 너무 늦게 시대를 잡은게 아닌가 한다.
쓸데없는 애향심의 발로가 아니라 필자의 의견은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BC 500년을 전후로 하여 수백년간 삶이 이어진 제주의 오래된 마을 터라고 소개하고 싶다.
한가지 더 유감인것은 한반도와의 교류를 한다는 것은 그 만큼 배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이고 배를 만드는 도구가 발전되어 있을 만큼 문명이 발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시관에 기원전후 선사시대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미니어쳐는 마치 신석기시대의 수렵 및 채집생활하는 원시인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중국에서는 이 시기보다 500년전에 공자가 있었고, 이미 진나라 때 희대의 사기꾼 서복이 다녀간 지도 200년이나 지난 싯점이다.
이시기에 우리 탐라인들은 원시생활을 하고 있다는 건데 유감이다. 필자가 틀릴 수도 있겠지만 전문가들의 조언을 기대해 본다.
■ 강운봉 가옥
올레에서 이문간을 거쳐 안커리 밖커리로 구성되어지는 제주의 전통 초가와는 달리 올레에서 바로 마당으로 이어져 안커리와 밖 커리가 마주보고 있는 형태의 초가이다.
19세기말에 지어졌고 다소 변형된 제주초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네칸의 가옥구성은 당시 지역의 부유한 집안임을 알 수 있고 통시 뒤의 오래된 팽나무와 돌로된 자그마한 계단은 이 가옥의 고즈넉한 운치를 더해 주며 제주초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 삼양수원지
삼양은 예로부터 삼양해수욕장을 중심으로 용천수가 풍부하게 나오던 동네였다. 이 풍부한 용천수로 인해 삼양동 선사유적지에서 보듯이 오래 전부터 집단 주거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제주시에서는 도시의 확장에 따라 부족한 식수원을 확보하기위해 삼양해수욕장에 1960년대부터 제1,제2 수원지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상부지역의 급속한 확장(삼화지구 아파트단지 등)에 의한 지하수의 오염 문제등으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비상식수원으로 전환되었다.
■삼양해수욕장
삼양해변은 화산암편과 규산염광물이 많은 세립질 모래로 이루어져 있어 검은 색을 띄고 있다. 이는 패사로 이루어진 함덕,표선,협재등의 해수욕장과 대조를 보인다. 삼양해변의 검은 모래는 해안주변에 분포하는 화산암이 오랜 기간동안 침식되어 만들어진 것과 하천을 통해 운반되어진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래찜질-출처 제주시 공보실
예로부터 삼양의 모래찜질(모래뜸)은 관절염, 피부염, 신경통, 무좀등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치료적 목적으로도 여름에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오영호 작 삼양동연가 시비ㅡ서예가 한곬 현병찬 글씨
■가름포구
삼양은 설개, 가물개, 매촌 세 동네가 합쳐져서 삼양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개'는 제주어로 포구를 의미하고 '가름(카름)'은 동네라는 뜻이다
가름포구의 여름 물놀이
삼양 1동은 '서흘포'라 하고 통상 '설개'라고 불리던 곳이다.
가름포구는 설개의 '서카름(서쪽동네)'에 있는 포구이다. 용천수를 제주에선 '산물' 이라고 하는데 가름포구에는 다섯군데에서 산물이 군락을 이루며 솟아난다. 이 산물은 동쪽으로부터 '남저(남자)목욕통', '큰물(여자목욕통)', '샛도리(샛도림)물, '독(닭)통물', 순으로 반원을 그리며 분포하고, 큰물 맞은편 길 건너로 '엉덕물'이 위치하고 있다.
남저목욕통 전경
밀물 때라 바닷물이 가득하다.
큰물(여자목욕통) 내부
가름포구의 다섯군데 산물 중 용출수가 가장 많이 나오는 큰물은 여자목욕통과 입구의 식수통으로 되어 있다. 제일 큰 물을 여자목욕통으로 한 것은 배려일까 아니면 여자들의 입김이 세서일까. 암튼 식수통도 같이 있는 것을 보면 물 긷는 노동은 여인들의 몫이었다는걸 짐작케 한다.
샛도리물에 대한 제주국제대학교 고병련 교수의 글이다.(고병련 교수는 제주의 용천수 관련 많은 연구를 하였고 '섬의 산물'이라는 저서 발간)
'제주굿은 시작할 때 새를 쫓는 행위인 '새도림'을 지낸다. 새도림은 새를 쫓는다는 제주말로 새를 쫓음으로서 모든 사악한것을 떨쳐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샛도리물은 굿을 할 때 깨끗한 물을 뿌리며 정화시키는 나쁜 기운과 잡귀인 새(제주섬에서는 잡귀는 까마귀라함)를 쫓아내는 '샛도림(새쫓음)'을 하기 위해서 이 물을 길어다 쓴데서 하는데서 연유한다'
샛도리물
고병련교수는 샛도리물이 기가 센 물이기 때문에 출수구 바닥에 고래(방아돌)을 놓아 물을 감싸듯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어 물을 달랜 후 용솟듯 바다로 빠져 나가게 하였다고 설명한다.
과연 이 고래를 놓은 조상들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하늘에서 내려와 메마른 땅을 적시고, 어둡고 긴 용암속 터널을 지나 사람들에게 삶을 이어주면서 거침이 없이 흘렀던 산물을 잠시 쉬게하고, 바다로 가기전 우리를 한번 돌아봐 주십사하는 기원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위 사진 하부의 공간이 독통물이다. 농기구를 씻는등 허드레물로 사용했다고 한다..
큰물 길 건너에 있는 엉덕물은 바위아래서 샘솟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밀물시에도 짠 물이 섞이지 않아 밀물 때 식수원으로 사용했다.
■동카름 성창
동카름에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삼양3수원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가막작지물'과 '우수미물' 두곳의 산물이 있어 중요한 식수원으로 사용되었었다.
한여름에도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감돌개하는 이 산물을 맞으러 올 여름에는 꼭 가봐야겠다. 무더운 여름날에도 이런 용천수탕 안에서 1분을 버티기도 힘들다는것을 제주사람이면 다 안다. 용천수 찬물 샤워는 여름 무더위에 지친 몸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원당봉
원당봉은 봉우리가 일곱개가 있어 삼첩칠봉으로 불리기도 했다. 원당봉 내에는 원당사(태고종), 불탑사(조계종), 문강사(천태종) 세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제주에는 과거 25개의 봉수대와 38개의 연대가 있었다. 이 곳 원당봉에도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제주의 360여개 오름 중 해안가를 따라서 25개의 봉수대와 그 사이를 잇는 하위개념의 연대가 38개소가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오름 중에서 '봉'이라고 이름이 붙은 오름은 대부분 봉수대가 있었던 오름이라 보면 된다.
근처 주민들이 운동 삼아 산책을 하러 많이 찾는 곳이다. 원당봉 둘레길은 약 1Km정도 되는데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쯤 둘러보는것도 괜찮을 듯하다.
■문강사
문강사는 대한 불교 천태종 제주교구 사찰이다. 1973년 김용운이라는 분이 1,500여평의 사찰부지와 7평의 영문각을 천태종 제주지역 신도회관으로 시주하면서 성립되었고 1975년에 사찰이름을 문강사로 바꾸었으며 여러차례의 중수로 지금에 이른다. 생활속의 생활불교를 실천하는 생활도량으로서 많은 이들이 찾는다.
원당봉 오름의 분화구 안에 위치하고 있어 부처의 품안에 포근히 있는 듯한 분위기가 마음의 위안을 저절로 느끼게 한다.
거북못이라고도 불리는 이 연못은 분화구내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당봉의 산정호수이다. 참으로 신비한 제주의 오름이다.
■불탑사
불탑사는 고려말 원나라의 영향으로 세워진 원당사가 있던 터에 1914년 무렵 중창된 사찰이다. 불탑사 맞은 편에 위치한 현재의 원당사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동명의 사찰이다. 과거의 원당사에 있었던 5층석탑이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불탑사는 1948년 4.3당시 전소되어 삼양으로 소개되었다가 이후 몇 차례의 중수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원당사는 고려 충렬왕 26년에 원나라 성종이 왕자를 얻기위해 세웠다는 설이 있다.
이 석탑은 불탑사 5층석탑 또는 원당사지 5층석탑이라고 불린다. 명칭을 정하는 기준은 모르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원당사지 5층 석탑이 맞다고 본다. 원래 원당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의 탑은 제작에 있어 소재가 다른것이 특징이다. 중국은 벽돌로 쌓아 만든 전탑, 일본은 나무로 만든 목탑, 우리는 돌로 만든 석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백제에는 벽돌은 아니지만 중국의 영향을 받아 돌을 벽돌 형태로 만들어 쌓은 전탑이 여러군데 남아있다. 우리나라는 원래 목탑구조였다가 점차 석탑으로 바뀌며, 석공기술의 발달로 석탑이지만 목탑의 형태로 만든 것이다.
탑은 원래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웠던 것이 점차 사찰의 배치에 있어 의장적인 건물로 자리잡게 되며, 후에 승려의 사리를 안치하는 '부도'도 생겨난다.
불탑사5층석탑(원당사지 5층석탑)은 육지부에서의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과 달리 제주의 지역적 특색인 현무암으로 만든 제주 유일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미가 깊다고 할 것이다.
신촌으로 가는 길에 꽃으로 하얗게 덮힌 밭이 보여 다가가 보니 무우밭이다. 종자 수확을 위해서인지 웃자란 줄기 위로 소담하게 밭 가득 꽃이 피어있다. 메밀꽃 밭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무우 꽃밭은 보기 드문 광경이다. 제주에선 걷다 보면 뜻하지 않게 이런 귀한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요즘은 보리가 쌀보다 귀하다. 그만큼 가격도 비싸다. 혼분식을 장려하여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격세지감이다. 새파란 청보리의 청순함도 좋지만 누렇게 완숙된 보리밭의 정경은 풍성함을 가져다 준다. 육지의 가을 풍경이 아니다. 제주의 늦은 봄 풍경이다.
최근에 세워진 듯한 비석인데 친구인 망자를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쓰여져 있다. 친구를 그리는 마음을 탓할 바는 아니나 해안 절경에 이런 비를 세워도 되는건지 의문이 든다면 너무 인정머리 없는걸까.
여름이 다가오는 늦 봄 무우 꽃밭과 잘익은 보리밭, 그리고 메밀 꽃밭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건 제주에서만의 특권이다. 예전엔 땅의 척박함으로 어쩔 수 없이 절박했던 풍경이 이제는 풍요로움으로 다가온다.
■닭모루
바다로 뻗어 나간 지형이 닭의 머리를 닮았다고 이름 붙여진 곳이다.
닭모르, 닥모루 등으로 불리는데 정확한 지명의 표기 통일이 필요해 보인다. 지명의 혼재는 이 곳만의 문제는 아니다. 체계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통일된 제주어 표기법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짙은 검은색의 거친 현무암 바위들이 제마다 마쵸기질을 뽐내며 세찬 파도와 바람을 견뎌내고 있다. 사람들이 세운 정자에 진입하는 진입로의난간대가 속절없이 바람에 망가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낚시인들의 포인트로도 유명하며 특히 여름에는 한치낚시의 명당이다.
닭모루 해안가에 서있는 기암괴석을 주민들은 버섯바위라고 부르는데 이 바위가 닭머리를 닮아서 이 일대를 닭모루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 환해장성을 담벼락 삼아 고즈넉한 초가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헐렸다. 이 환해장성의 흔적만큼은 헐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올레에서 이문간으로 들어가는 전형적인 제주 초가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비록 지붕은 관리의 문제로 검은색 포장으로 덮여 있지만 바닷가 예전 초가의 정취는 그대로이다.
집은 현대식으로 개량되고 새로 지어졌으나 돌담만큼은 그대로 간직하고 사는 이 동네분들의 마음이 엿보이는 동네 풍경이다.
신촌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은 산물(용천수)이다. 명칭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수량도 풍부하고 맑다. 관리도 잘 되어 있어 소중한 식수원이었던 이곳에 대한 마을 분들의 마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은 버려진 듯 통행이 없는 길이지만 예전엔 이 길을 따라 포구로 부지런히 드나들었을 길이다. 언젠가 다시 여기에 올 때에도 이 옛길이 부디 남아있길 바라며 걸음을 옮긴다.
신촌 포구에 위치한 남당물은 오래전부터 남자들만 이용하던 물이다. 수량이 풍부하고 물이 맑고 달다고 한다.
현대식으로 잘 정비되어 있지만 과거의 영화를 되찾기엔 찾는 이가 드물어 아쉽다.
신촌포구는 오가는 배들이 많지 않아 번잡하지 않지만 찾는이가 많다. 아기자기한 포구의 모습이 눈을 즐겁게 한다. 낚시하는 이도 많고 꼬마들 노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우리도 어렸을 적엔 바다가 놀이터였다. 예전의 포구와 확장된 방파제가 같이 하고 있다. 정겹다.
신촌 포구에서 향사로 가는 길은 고즈넉하지만 군데군데 새롭게 꾸민 집과 가게들이 길손을 반긴다.
■신촌 향사
최초 설립 연대와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1805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고 1877년 부분적으로 개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신촌 지역의 공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주변의 오래된 나무와 정갈하게 관리된 정원의 모습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여유가 된다면 이런집 한 채 꿈으로나마 그려본다.
관리의 문제는 별개지만.
■조규창 가옥(신촌 와가)
안거리 와가는 기와집으로 제주도 민속자료 4-5, 밖거리 초가는 제주도 민속자료 3-20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민속자료를 보존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겠지만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문을 걸어 잠궈 내부를 볼 수 없는게 아쉬운 부분이다. 문화재를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이용적 측면에서 개선할 방법은 없을까. 소정의 입장료를 받고서라도 마을에 위탁운영 한다든가 하는 방법은 없는지. 제주시내 삼도동에 있는 향사당도 그렇고 출입을 못하게 하는 것이 문화재 보존의 최선인지 다같이 생각해 볼 때이다.
어느 집 담너머로 종려나무와 이름 모를 꽃이 여정의 끝임을 아는 듯 손짓으로 작별 인사한다.
( 신촌초등학교앞으로 와서 버스를 타고 출발지인 삼양동 선사유적지로 가면 됨.
도보로 약 11km 두시간 반에서 세시간 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