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역사나들이길

화북동 제주역사나들이 2차 화북 탐방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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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코스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주차하고 출발하면 됩니다.

코스는

국립제주박물관ㅡ모충사ㅡ칠머리당ㅡ애기업은돌ㅡ곤을동ㅡ화북비석거리ㅡ김석윤가옥ㅡ청풍대ㅡ화북진성ㅡ해신사ㅡ별도연대ㅡ환해장성ㅡ삼사석 입니다.

삼사석에서 출발지인 제주박물관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됩니다.

■화북동(화북리)

 


현재 화북동 일대 및 옛길 (빨간점선은 탐방로)

화북포는 별도포라고도 하는데

1601년 김상의 남양록에는 별도포

1653년 효종4년에는 화북

1843년 중좌면 별도리

1879~1904년 공북리라고 불리다가 그 이후 1914년 화북리로 다시 개칭한다.

화북포라는 명칭은 북쪽에서 벼(禾 화)를 실어오는 포구라는 의미라는게 맞는 듯 하며, 별도포는 벨돗개,벨뒷개라고 불리던 지명을 한자로 차음한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제주읍내와 마찬가지로 화북 원마을 내에는 옛 길과 오래된 초가, 옛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우리 제주의 옛 정취를 한껏 보여준다.

 

1914년 화북리 일대 지적도 및 주요 옛길

비록 일제가 1914년에 작성한 제주도 지적도 이지만 그 당시 길이나 지적등의 모습을 알 수 있어 나름 귀중한 자료이다.

제주 원도심과 마찬가지로 가급적 남아 있는 화북일대 옛길을 따라 골목골목을 걸으면 우리 선조들의 삶의 숨결이 한층 가까이 느껴질 것이다.

■ 국립제주박물관

 

답사의 출발전 이곳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제주의 역사자료를 한 곳에 모아둔 곳이다.

■ 우당도서관


대우그룹 김우중 전회장이 부친의 호를 따서 지은 우당도서관이다. 우리 또래 많은 이들이 청춘시절 공부도 가끔하던 추억의 공간이라 감회가 새롭다.

물론 지금도 도서관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

■모충사


모충사 입구

모충사에는 제주의병항쟁탑을 가운데 두고 우측엔 의녀반수김만덕의인비, 좌측엔 순국지사 조봉호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의병활동이나 조봉호지사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제주의병항쟁기념탑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비


의녀반수김만덕의인비

유홍준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제주편'에서 말한 폴대가 바로 이것이다. 모충사를 조성하고 공원처럼 잘꾸며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거듭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유홍준 교수 말씀처럼 이렇게 거대한 폴대를 꼭 세워야 하는지 나 역시도 의문이다. 지금은 주변 수목이 울창해서 그나마 나아졌지만 어릴때 덩그라니 하얀 세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은광연세 마애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추사 김정희가 김만덕의 은공을 기려 오빠의 증손자에게 써준 '은광연세'(은혜로운 빛이 온세상에 퍼진다는 의미)의 글씨를 돌에 새긴 마애비이다. 힘든 유배생활에서도 추사는 김만덕의 공에 감복해 그를 기려 글을 남겼다.

 

김만덕의 묘비

원래자리인 건입동에서 여기로 옮겨졌다. 여기에 소박하게 자리한 김만덕의 묘비가 언덕에 높이 솟은 의인비보다 더 정겹고 그 분의 애민정신이 훨씬 다가온다. 선행을 베품에 있어 공치사하기 보단 당연한 듯 조용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제작한 타임캡슐.

제주 특유의 방사탑을 모티브로 한 타임캡슐이다. 3001년에 오픈한다니 그때 후손들은 지금의 자료를 보고 어떤 상상을 할지 궁금해진다.

 

모충사를 나와서 칠머리당으로 향하는 길에 곱게 핀 연산홍

■칠머리당

 

칠머리당

바다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제주인의 해상안전과 풍어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영등신에게 빌던 칠머리당이다. 원래 건입동 바닷가에 위치하였는데 시가지 확장으로 이곳 사라봉 기슭으로 옮겨졌다. 매년 음력2월1일에 영등환영제(영등맞이굿) 와 음력2월 14일에 영등 송별식을 거행하며, 송별식을 더 성대하게 한다고 한다.

 

애기업은돌로 가는길

칠머리당에서 애기업은 돌로 가는 길은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제주항을 품은 제주 앞바다를 보면서 걷는 걸음이 상쾌하다. 제주시민 뿐만 아니라 올레꾼들도 많이 찾는 길이다.

■애기 업은 돌

 

애기업은 돌

바위형상이 애기를 업은 것처럼 보인다.

흔히 사자바위등 바위를 동물 형상에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 애기업은돌이라 이름지은 것은 그만큼 우리 제주인의 정서가 녹아든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바위에서 바다쪽으로 30미터정도에 솟아 있는 바위가 그 유명한 자살바위이다. (예전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라는 문구가 써 있었다고 한다)

애기업은 돌은 나를 업고 키운 어머니 또는 업고 키우는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극단적 선택은 안된다고 암시하고 서 있는 아닐까. 무언의 메신저로서 삶을 포기하려 이 곳까지 온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곤을동으로 가는 길 입구

사진에보이는 가로등 좌측으로 난 샛길로 가야 곤을동으로 이어진다. 무턱대고 올레길 리본만 따라가면 오현고등학교 뒷길로 이어진다. 이정표 하나라도 제대로 세워주는 행정을 기대해 본다.

 

곤을동으로 이어지는 내리막 샛길. 비올땐 조심

■곤을동

 

곤을동마을 전경 


화북천 건너편에서 바라본 안곤을 마을터

4.3의 아픔을 간직한 채 아직도 폐허로 남아있어 화창한 봄날에도 그 처연함과 안따까움, 슬픔이 가득 묻어난다.

곤을동은 '고놀개' 라는 옛명칭을 한자로 차음한 것이다. 제주어로 '개'는 포구를 의미한다.

고놀개 즉 곤을동은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데서 유래한다. 화북천이 곤을동에 이르러 양쪽으로 갈라지는데(위 지도 참조) 하천 서쪽을 안곤, 가운데를 가운디 곤, 동쪽을 밧곤이라 불렀다.

안곤은 용천수 안드렁물을, 가운데곤과 밧곤은 덕수물을 식수로 썼다.

1949년 4.3의 광풍이 한창인 때 1월4일과 5일에 걸쳐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전소되고 주민 24명이 희생된다.

당시 무장대가 화북일대 도로를 돌로 차단하고 군인들을 습격하였고, 수많은 군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군인 중 생존자가 무장대 한명이 곤을동 마을로 도주하는 것을 보고 상부에 알렸고, 이로 인해 아무 죄가 없고 평화로웠던 곤을동 마을에 보복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토벌대의 주민 학살은 주로 중산간지대에서 일어났으나, 북촌리와 더불어 곤을동 같이 해안마을에서 발생한 것은 4.3중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다시는 이런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고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안곤을을 지나 화북천을 건너 가운디 곤으로 가는 길 - 비가 많이 올 때는 주의해야 함


가운디 곤으로 올라가는 계단. 여기를 올라서 우측으로 가면 비석거리로 가는 길이다

■화북비석거리

 

화북비석거리의 13개 비석

원래 화북일대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한 곳으로 모아 화북동사무소 근처에 있던 것을 도로 계획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

제주에 왔던 목사나 판관등 관리들은 화북포를 거쳐 들어왔다가 다시 육지로 나가곤 했다.

원래는 관리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으나 조선후기에는 너도나도 자기 공치사하려고 선정비,공덕비,거사비등의 명목으로 세운듯 하다. 예로 임헌대라는 목사는 본인의 폭정으로 민란이 일어나자 화북포에 숨었고 귀환후에 파직당한 인물인데 버젓이 거사비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셀프 비석(?)이 아닌가 한다.

19세기에 이르러 세도 정치 및 민씨 척족들의 매관 매직으로 들인 돈을 회수하려는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 민중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제주의 경우는 정도가 더 심했다고 한다. 대부분 자기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가렴주구를 행하였음에도 버젓이 자기 공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물론 선정을 베푼 선량도 있기는 했다.

여기 화북의 비석거리의 비석뿐만 아니라 제주도내 이런 비석들에 새겨놓은 이름이 훼손된 곳이 많다.

당시 민심을 대변하는 방증일 것이다. 특히 이름 석자 중 성에 훼손을 많이 했는데 가문을 중시했던 우리 사회의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 나와있던 13개 비석을 일일히 비교하고 희미한 글자를 확인하여 순서대로 누구의 비석인지 맞추어 보았다.(여기에 이의가 있는분은 언제든지 지적바란다.)

좌측으로부터 첫번째

목사 심상연 청덕비(1683.6~1685.9재임)

아마도 제일 오래된 비석일 듯하다.

재임시 조정에 청원(계청)하여 문관이 제주목사로 부임시 해마다 제주사람 두명을 과거시험 볼 수 있게 하는 선정을 베풀었다.

두번째

목사 홍공규 거사비(1884년 전후 재임)

1884년 연희각 중수

세번째

불망비(알아볼수 없음)

네번째

목사구공재룡거사비(구재룡 1839.3~1841.3파직)

부역과 추렴을 가벼이하고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당시 모슬포에 영국선박이 출현했는데 두려움에 대응 않다가 파직당했다.

도남과 일도동에도 비석이 있는데 아마도 후에 동생이 제주목사로 부임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보인다.

다섯번째

찰리사이공규원청덕비(이규원 1891.9~1894)

김지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하자 찰리사로 와서 안정시켰다.

1892년 오현단을 귤림서원 옛터에 축조하고1984년 갑오개혁에 의해 각종폐단을 혁파(?)했다고 한다.

여섯번째

목사 윤공구동청덕선정비(윤구동, 1815~1817재임)

재임시 이양선표류시 민폐를 없에려 공피전 1800냥조성하고 공피창을 운영했다.

후에 1817년 흉년시 이 자금으로 전라도에서 구휼미 구입하여 도민구제하였으며 외도동 월대, 성산읍 수산리에도 공덕비가 있다.

일곱번째

목사이공원달휼민선정비(이원달, 1837.11~1839.3)

재임중 세금감면, 환곡의 폐단 방지에 힘썼다.

당시 표류를 가장하여 풍랑속에 배를 띄웠다가 익사하는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와중에 상습적으로 의도적 표류행위를 한 제주인 고한록 처형한다.

여덟번째

목사장공인식휼민선정비(장인식,1848~1850)

제주의 환곡이 과하다고 비변사에 고해 절반으로 줄게하였고 공진루를 중수한다. 상현사를 영혜사로 개명하고 당시 유배중인 김정희의 글씨를 받아 편액설치하고 삼성사에 숭보당을 건립,학업을 장려한다.

북성안에 무사 사격훈련장 심고당을 건립하고 남학당,서학당,우학당을 거설하여 학문장려에 힘쓴다.

용담동 향교, 삼성혈에도 선정비가 있다.

아홉번째

목사이공현공휼민선정비(이현공,1850~1851)

1850년 관덕정중수하고1851년 제주향교에 서재를 건립하여 학문을 장려한다.

삼성혈에 삼성혈 사우를 개건한공로로 삼성혈에도 거사비 있다.

열번째

판관고공경준거사비(고경준,1883.8~1885.4 제주판관재임)

제주출신으로 제주의 지역 및 유학발전에 힘썼다.

흉년에 백성이 부담할 환곡을 자신의 녹봉으로 감해준다.

한경면 두모리에도 선정비가 있다.

열한번째

목사백희수휼민선정비(백희수,1851.7~1853.12 재임)

귤림서원을 개건하고 1851년 별저미와 내탕전 1천냥을 조정에 요청하여 진휼한다.

1852년 충암 김정의 적거지에 김충암적려 유허비를 세우고 비문을 직접 썼다.

열 두번째

목사 임공헌대거사비(임헌대, 1862.2~1863.1파직)

1862년 진주민란의 여파로 제주민심이 흉흉하던때 세금포탈로 임술농민항쟁이 발생한다. 강제검,김흥채가 세금때문에 민란을 일으키자 도민들이 호응하여 제주읍성을 점거하자 화북으로 도주했다가 달포후 귀환했으나 파직되어 평북초산으로 유배된다.

열세번째

조방장홍공재우거사비(홍재욱)

화북진성을 보수할때 공을 많이 세운 기술자로 알려진다.

이상 열세개의 비석의 뒷조사(?)를 해봤다. 비석의 주인공이 훌륭한 분이든 아니든 그 분들이 있어서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게 아닌가한다.

 

화북의 옛길

거의 원형으로 남은 이 길은 그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것이다. 새 도로가 나면서 지금은 버려진 듯 오가는 이 없이 무심하기만 하다. 지금 발끝에 채이는 돌은 과거에도 수많은 이가 밟고 다녔을 그 돌일 것이다.

 

금돈지 입구에 있는 용천수 큰짓물

아마도 옛날 큰길가에 있다고해서 큰질물이 큰짓물로 된게 아닌가 추측한다. 제주읍의 한질골이 한짓골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반듯하게 정비가 잘되어 있어 과거의 모습은 아니지만 맑고 힘차게 솟는 그 물은 여전하다.

 

해안에 면한 가옥의 돌담

큰짓물 바다쪽에서 좌측으로 보면 바다에 면한 가옥의 담이 보인다. 아마도 환해장성의 흔적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러한 구조의 주택은 신촌, 조천,북촌 일대에서도 아직 많이 남아있다.

■ 금돈지

 

금돈지 전경

화북진이 둘러싸고 있는 마을 안쪽포구를 '금돈지'라고 불렀다.

화북촌의 포구는 그 안에 두개의 포구가 있었는데 서쪽은 금돈지 또는 새성창이고 , 동쪽의 것은 엉물 머릿개 또는 묵은 성창이다.

제주어로 포구는 '개', '성창','돈지'등으로 불렀다. 이 중 성창은 선창의 표음인듯 하다.

'돈지'는 군대가 주둔한 곳의 의미인 '둔지'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고, 제주어로 바다에 면한 땅의 의미인 '돈지'그대로 쓴거라는 설이 있다.

나는 후자가 맞다고 보는데, 위미쪽에 돈지할망당이 있고 제주항에 돈지머리포구라는 지명이 있는 것을 그 근거로 본다.

■김석윤가옥

 

청풍대에서 바라 본 김석윤가옥 전경

1913년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김석윤가옥은 안커리(안채)와 이문간(대문이 달린 바깥채)은 기와 지붕으로, 밖커리(바깥채)와 목커리(별채)는 초가 지붕의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진 가옥이다. 필자가 어릴때 살던 집도 안채는 기와집, 바깥채는 초가 형태였다.

1978년도에 제주도 민속자료 4-1로 지정되었다.

기와집은 옛 제주에선 관청과 무근성 일대를 제외하고는 드물어서 이곳에 위치한 김석윤가옥은 그 가치가 특별하다.

■청풍대

 

화북의 청풍대.

관리들과 주민들이 주변의 경치를 즐겼다고 전해지는 화북의 청풍대이다. 과연 옛날 주민들이 관리들과 같이 한가로이 나무 밑에서 휴식할 여유가 있었지는 의문이다.

이 곳과는 별도로 '제주목 도성지도'에 오현단 남측 동치성 상부에도 '청풍대'가 표기 되어 있다.( 지금은 복원된 제이각이 위치하고 있는데 청풍대 자리에 제이각이 있었던건지, 제이각을 청풍대라고 달리 불렸던건지 정확한 자료를 찾기가 힘들다.)

■화북진성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화북진성

18세기 초 제주 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화북일대를 보면 당시 화북진성의 북쪽이 바다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당시 지적도의 화북진성에도 화북진성북측은 길만 나있고 바다였음을 볼 수 있다.

1914년 지적도를 보면 화북진성은 과거에 바다에 면하여 있었다. 이처럼 바다에 직접 면한 진성은 조천진성,애월진성, 별방진성등이 있다.

바다로부터 침입해 오는 외적에 대한 방어가 절실했음을 엿볼 수 있다.

 

화북진성 북측 바닷가로 돌아가는 옛길

 

현재 매립되어 있는 곳에서 남측으로 바라본 화북진성

화북진성이 현재 위치에 거의 온전한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실로 고마운일이다. 아쉬운 것은 탐라순력도에 보이듯이 성곽상단에 여장(방어시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한 요철모양의 담)이 있어야 하는데 어느 세월엔가 없어진것 같아 안타깝다. 이는 최근 복원한 제주성지도 마찬가지인데 복원의 경우 철저히 고증을 하여 만들어야 함에도 그냥 높은 담으로 밖에 안되어있다. 이는 역사학자 이영권 선생도 지적한 바 있다. 현재는 애월진성에서만 여장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해신사

 

해신사 전경

1820년에 건립, 해상의 안전을 기원하던 곳으로 원래 다른 곳에 있다가 1978년에 이 곳으로 이전되었다.

토속신앙을 유교식으로 변신시켜 유교적 통치이념하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었다. 한때 토속신앙적인 형태로 제를 지내다가 현대에 다시 유교적인 형식으로 제를 지낸다고 한다.

 

별도연대로 가는 길

제주의 옛길은 언제나 정감이 가고 고즈넉하다. 중간에 만나는 옛 초가집은 그 자체로 생활 속의 민속 박물관이다. 우리 세대까지만 해도 어린 시절에 뛰어 놀던 추억의 한자락을 소환하는 정겨운 골목 풍경이다.

■별도연대

 

별도연대

별도 연대는 동쪽으로는 원당봉수, 서쪽으로는 사라봉수와 연계하였다.

연대는 봉수대의 하위개념으로 규모가 봉수대 보단 작았다.

안내문에도 '높이 및 너비가 각각 10척 (3미터)이다'라고 쓰여 있다. 지금 복원한 것을 보면 10미터 이상으로 만들었다. 원래 작았던 것을 고증을 했다고 하면서 크게 만든 건 무슨 연유일까.

원형보다 크게 복원하고 누군가는 뿌듯해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크고 높게 만든 덕에 환해장성과 제주 바다를 바라보는 풍광은 장관이다. 안내문에 고증을 거쳤다는 문구를 안 읽은걸로 해서 타협을 볼까 한다.

■환해장성

 

화북동 환해장성 전경

1270년 10월 진도 주둔 삼별초에서 이문경을 제주로 파견하여 제주를 근거지로 삼을 계획을 세운다. 이를 눈치 챈 고려 조정은 그해 9월 미리 김수 장군을 보내 제주를 방어케 하는데 200여명의 군사를 보낸다. 그 후 고여림을 70여명의 군사와 함께 보낸다.

김수는 삼별초에 대비하여 도민을 동원에 환해장성 축조를 시작한다.

삼별초의 이문경은 동제원(지금의 오현고 앞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김수의 관군과 전투에서 이겨 제주 지배에 들어간다. 처음엔 제주도민들이 수탈만 일삼는 고려관리에 대한 반감으로 삼별초를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삼별초가1271년 진도에서 관군에게 지고 김통정이 제주로 오면서 제주도민은 다시 더욱 더 고초를 겪었다. 이 환해장성을 비롯한 각종 군사시설 확충, 무기 및 선박제조, 군량미 조달 등 제주도민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배가 고파서 자기가 눈 똥을 먹으려고 돌아보니 남이 주워 먹었다는 비참한 말이 전해져 내려왔을까. 제주의 민심은 당연히 삼별초에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273년 3월 1만여명의 여몽연합군을 이끌고 입도한 김방경에 의해 4월28일 항파두리성이 함락되고 6월 김통정이 붉은 오름에서 자결하는 것으로 제주에서의 삼별초의 난이 끝난다.

삼별초는 외세에 끝까지 저항한 자주세력일까 아니면 제주인에게 고통과 희생만을 안겨준 외부 침입세력일까. 그후 '목호의 난'때에도 제주도민들은 고려정부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륙을 당하는 고통을 겪는다.


중간에 옛길에 면한 올레

옛날엔 이런 올레마다 개구장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놀았다. 골목에서의 아이들이 웃음소리가 이제는 제주의 어느 마을에서건 보기 힘든 풍경이 되어 버렸다. 그 많은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옛길 답게 초가집을 비롯한 오래된 집들이 많이 남아있다

초가지붕대신 슬레이트를 얹고 있어도 나즈막한 지붕과 남아있는 돌담은 옛 마을의 풍경을 잘 간직하고 있다.

■삼사석

 

 

삼사석

삼성혈에서 나온 3선인이 살곳을 정할때 쏜 화살을 맞은 돌이라고 한다.

그런데 화살을 쏘아 정한 곳이 제주읍의 일도리,이도리,삼도리라 알려져 있는데 어째 화북에 이 돌이 있을까. 왜 여기에 삼사석이 있는지 속 시원히 알려주면 좋겠다.

암튼 화살이 돌에 꽂힐 정도면 엄청난 괴력의 3선인인 듯하다.

삼사석 버스정류장에서 버스타고 출발지인 국립제주박물관으로 돌아가는걸로 나들이를 마친다.

 

 
입회비 및 후원계좌 : 제주은행 6901008085
(예금주:사단법인 제주문화역사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