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근성 용담동 제주역사나들이 원도심 무근성-용담코스
페이지 정보
무근성과 용담동(용담일동)일대의 옛길을 걸으며 옛지명과 산재한 제주인의 삶의 흔적을 둘러보는 코스입니다.
이번 코스의 시작은 서문다리 옆 제주은행 맞은편 송림반점에서 시작합니다. 지난 번에도 소개했지만 59년도에 화교가 개업한 이후 79년도에 현재 주인장께서 인수하시고 현재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중국음식점입니다.
40년 세월동안 한자리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계시는것도 놀랍고, 음식맛이 변할까봐 가족끼리만 운영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간단히 40년 전통의 짜장이나 우동 한그릇 하시고 길을 떠나보길 추천합니다.
■무근성(陳城)
원래 무근성은 병문천과 해자길, 구린질 사이 일대 삼각형 형태의 마을을 일컫는다(맨 윗 그림 참조). 과거 관아에 근무하는 관리(조관)들과 부호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다.
무근성(묵은성)은 탐라국시대(5~6세기 전후) 때 성이 있었으나, 제주읍성이 새로 생기면서 없어진 오래된 성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관련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확실한 자료도 없으니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1750년에 발간된 '해동지도 제주 삼현도'에 보면 제주읍성 아래 진성(陳城)이라는 지명표기가 나온다. 여기가 무근성이다. 진(陳)은 베풀다의 뜻도 있지만 묵다(오래되다)의 뜻도 있다. 지명을 한자표기 한 것이다.
□서문 해자길
※해자길(이 명칭은 과거 해자를 따라 이어진 길이기 때문에 필자가 편의상 이름 지은 길로서 공식적 명칭은 아님을 일러둡니다)
서문을 나와 성굽길을 돌아서면 병문내를 건너기 전 다리 입구를 들물거리라 했다. 위 그림의 빨간 점선이 서문다리가 생기기 이전에 다리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 이다.
지금의 서문교는 복개되었지만 과거 일제가 1910년대에 신작로를 내면서 폭 5미터의 다리를 놓았었다. 그 다리가 생기기 이전에 아마도 병문천을 건너던 배고픈다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 다리를 건너면 향교를 향하던 길과 용담 부러리 마을을 지나 서쪽으로 가는 한질(한길,큰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서문 성굽길을 나와 들물거리(서문다리부근 옛지명)에서 무근성 방향으로 들어가는 해자길 입구이다. 지금은 도로명이 무근성 5길과 무근성안길로 되어 있는 길이다.
들물거리는 일제 때 서문다리가 생기기 이전 서쪽으로 가는 관문이었기에 넓진 않았지만 약간의 광장 역할을 했으리라 본다.
제주 읍성이 사라진 자리엔 지금 도로가 나 있다. 제주 원도심 지도를 자세히 보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위 사진에서 제주 읍성이 있던 자리 외곽으로 역시 성을 따라 타원형의 길이 나 있다. 이 길이 해자 주변으로 나 있던 길이다. 해자를 관리하던 길이다. 제주읍성이 훼철되고 해자가 있던 곳은 민가들이 들어섰지만 해자길은 그대로 남아 아직도 옛 흔적을 말해준다.
원래 제주읍성은 서쪽은 병문천을, 동쪽은 산지천을 자연해자로 삼아 성을 조성했으나 1555년 을묘왜변 이후 성을 동쪽으로 확장하여 산지천 밖에 다시 쌓았고, 서문쪽은 관리상의 문제로 병문천 안쪽으로 축성하였다고 한다. 제주읍성의 해자는 지형적 특성으로 물을 채울 수 없어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 등을 쌓아 놓아서 해자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해자길은 작은 골목길로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곳도 있고 확장되어 옛 모습을 잃어버린 곳도 있다. 그러나 제주읍성 주변으로 동쪽을 제외한 북,서,남측에 약 70%이상의 구간에 아직도 그 길이 이어져 남아있다.
무근성 방삿길이라고 이름지어진 해잣길의 일부 구간이다. 범죄예방을 위하여 환경을 설계하고 디자인 개선하는 작업을 셉테드(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라고 하는데 제주 최초로 2015년에 적용한 길이다. 야간 조명개선을 하고 비상 호출벨 설치, 도로 바닥표시, 담벼락 벽화등 환경개선(?)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도와 도경찰청이 공동작업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관리가 안되는 듯 보여 아쉽다.
관덕정에서 무근성을 지나 탑동까지 이어진 이 길은 탑동에 방사탑이 있었던 데서 연유하여 새로 명명한 길이다.
□무근성길
해자길이 이어진 골목길- 좌우로 만나는 길이 탑아래(탑동)으로 이어진 옛길(현재 무근성길)
탑동(탑아래)으로 이어지는 무근성길 (도로명) 이다. 옛날 서문에서 해자길을 거쳐 탑아래(탑동) 바닷가로 가는 주요 도로 였다
지금은 확장되어 옛길의 정취를 느끼긴 어렵다. 구린질과 만난다.
□조관집터
창성이용원 서쪽 일대가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조관(朝官)집터다. 조관집터 서쪽에서 병문천 사이 일대가 제주의 부호인 고만호 집안의 집터이다.
창성이용원 길 맞은편에는 강만호 집안의 집터이다.
만호(萬戶)라는 명칭은 고려 때 몽골식 직제로서 다스리는 호수(戶)에 의한 관리 직제였으나 점차 후대로 오면서 다스리는 가옥의 수가 아닌 직급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주로 변방의 요지를 담당하는 무장에게 주어진 직급이다.
일반 고을에서는 수령이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였으나 변방등 군사적 요충지에는 별도로 만호 계급의 무장이 파견되었다.
과거 어느 때인가 고씨성을 가진 만호와 강씨성을 가진 만호가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구린질(구린길)
구린질(길)은 무근성 북측을 지나는 지금의 북성로 서측 구간이다.
이 길을 경계로 북쪽은 탑아래(탑바리,탑동), 남쪽은 무근성 동네이다. 일제 이전엔 구린질 북쪽은 민가는 없었고 주로 밭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조관집터와 고만호, 강만호 집터 사이에 S자로 생긴 길이 있으나, 일반 평민들이 이 길을 통행하지 못하도록 그 지역 지주들이 땅을 내어 만든 길이라고 한다. 일반 백성들은 이 구린질을 통하여 병문내 일대 물통에서 물을 길어다 썼고, 배고픈 다리를 건너 부러리 마을과 한두기로 다녔다.
□삼도동 포제단
과거의 포제단 모습
현재 삼도동 포제단 모습
삼도동에서 마을 포제를 지내던 곳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복개되기전 병문냇가에 시원스런 팽나무를 이고 정취를 자아내며 동네아이들의 놀이터도 되어 주었던 포제단이다. 일년에 한두번 지내는 제를 지낼 때 추워서였을까. 알 도리가 없이 그저 아쉽다. 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탑동(탑알,탑아래,탑바리)
무근성에 청상과부가 많이 나오는등 마을에 안좋은 일이 많이 생기자 액운을 막는 방사탑을 두 곳에 설치했는데 그 아래 지역을 탑아래(탑바리)라고 했다. 세찬 바닷바람만이 황량하던 이곳에 민가는 드물었고 척박한 밭들만 펼쳐져 있었다.
위 사진의 방파제 너머 바다는 매립되어 호텔과 이마트등이 들어서 있어 과거의 모습을 찾을 길 없다. 흑백사진에서 보이는 옛 탑동의 정경에서 보듯 바닷바람에 실려온 미역내음과 짠내가 옛 기억을 소환한다.
어릴 적 놀이터였던 탑아래 바닷가의 끝없이 펼쳐진 먹돌밭은 이젠 잃어버린 과거이다. 울컥해진다.
□무선국밭
일제 때 찍은 위 사진이 당시 탑동의 황량한 풍경을 잘 보여준다. 지금의 오리엔탈호텔 자리로서 무선국밭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무선국은 이곳과 측후소 밑 두 곳에 있었다.
□사직단 터(사직이 터)
제주고을의 사직단터로 조선 숙종 45년(1718) 에 목사 정석빈이 이 곳으로 옮겼다. '사직이'로 불렀다.
토지신인 국사신(國社神)과 곡물신인 국직신(國稷神) 두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단을 쌓고 봉사하는 곳으로 사직단이라고 했다.
역시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용담동(龍潭洞)
용이 있는 못(용연龍淵)이 있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마을이다.
용연은 한천 하류에 수심이 깊고 좌우 절벽이 절경을 이루었기 때문에 영주 십이경중의 하나인 명소이다.
현재 용담 1,2,3동으로 행정구분되어 있다. 용담1동은 '부러리','새과양','궤가슬','한두기'마을을 아우른다.
무근성에서 용담으로 갈 때 병문내에 배고픈다리가 있었다. 지금은 병문천 일대가 복개되어 기억속에만 남아 있다. 복개된 도로 밑엔 그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배고픈다리는 무근성에서 동한두기와 부러리를 잇는 유일한 길이었다.
병문천 일대의 복개공사는 탑동매립 사업자가 매립으로 인한 수익을 제주시민에게 돌려주어야한다는 요구에 금전적 환원대신 병문천 복개공사를 한 것이라 한다. 아마도 매립지 진입도로 확충도 하면서 생색도 내는 꼼수였을거라 생각한다. 그런 시절이었다.
□한두기
한천하류 용연에서 동쪽은 동한두기,서쪽은 서한두기 마을이다.
동한두기 마을이 좀 더 규모가 크다.
동한두기의 버렝이깍에서의 물놀이-출처,사진으로보는 제주 옛모습, 제주시
한두기는 큰둑(한둑)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마도 용연 좌우의 높은 절벽을 둑으로 여겼으리라 짐작해 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둑을 쌓을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독포( 大凟浦)는 한둑의 한자 차음이다.
□서자복
동한두기 마을에 용화사라는 절 경내에 있다. 원래 해륜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18세기 중반에 없어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 1910년에 지어진 지금의 용화사가 있고 경내에 서자복이 서 있다.
용화사
복신미륵’, ‘자복신’, ‘자복미륵’, ‘미륵불’, ‘큰어른’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동한두기의 절동산(용화사 일대 옛지명)에 서 있다. 지금처럼 고층건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동쪽의 동자복과 더불어 제주읍내를 부릅뜬 눈으로 지켰을 것이다.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는 '제작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후기의 불상이 토속적으로 변모하는 과정 중의 한 양상인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로 추정되며, 머리에 씌워진 대패랭이와 비슷한 모양의 벙거지는 조선 후기에 새롭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되어 있다.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토속신앙과 불교가 융합된 복합신앙의 성격을 띄며, 서자복 옆엔 득남을 기원하는 남근석이 있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자복을 보호하기 위한 용왕각이 있었다고 하는데(윗 사진 참조) 무슨 연유인지 철거되고 없다.
□가시락당(고시락당)
제주에선 가정의 행복이나 기타 소원을 비는 당이 곳곳에 있다. 지금도 해안가 바위나 마을 곳곳에 당이 산재한다. 고단한 삶을 살았던 제주인들은 당을 찾아 절절한 소망을 빌었다. 이곳도 그런 곳인데 아마도 용연에 살고 있는 용에 의지 하고픈 마음 간절하지 않았을까.
발밑에 바로 보이는 용연에서 탐라순력도의 '병담범주'에 묘사된 것처럼 양반네들이 기생들 끼고 희희낙낙하고 있을 때 용이라도 물 속에서 휙 나타나 저 배를 뒤집었으면하는 심경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누군가 어떤 사연인지 치성을 드린 흔적이 역력하다.
□용연
한천하류에 양쪽으로 바위 절벽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용이 산다는 전설이 있는 만큼 수심도 깊고 맑다. 한천이 건천이니 용연의 물은 바닷물일 것이다.
어릴 적에는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이자 담력시험장이었다. 바위 높이에 따라 단수가 있어 높은 단수에서 다이빙할 수록 존경(?)을 받았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담력을 시험하진 않는다.
탐라순력도 병담범주에선 취병담(翠屛潭)이라 써 있다. 임제(1549∼1587)가 『남명소승』에서 이곳 용연을 취병담이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절벽의 울창한 푸른 숲이 절벽과 어우러져 물가에 짙푸른 색으로 비쳐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다.
절벽에는 취병담(翠屛潭), 선유담(仙遊潭) 등의 마애명도 있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찾아보고 싶다.
보름달 뜨는 날이면 배를 띄워 풍류를 즐겼다는데, 그 풍치를 ‘용연야범(龍淵夜泛)’이라 하여 ‘영주12경’의 하나로 쳤다고 한다.
과연 아무리 보름달이 떳다고 해도 굳이 밤에 배타고 놀이를 즐겼을까. 배타러 가는 길도 험했을 텐데. 그냥 상상에서 나온 풍류의 장면이 아닌지 괜히 딴지를 걸어본다.
□구름다리
다소 위험하게 출렁이던 작은 구름다리를 철거하고 새로 만든 구름다리이다. 출렁이는 정도가 스릴 넘치던 예전만 못하다. 안전을 생각해서일거다.
야간엔 조명시설을 해 놓아 꽤 볼만하다.
입구엔 연인들의 사랑의 징표로 유행이던 자물쇠를 걸어둘 수 있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자물쇠를 걸어둔 연인들이 그마음 그대로 백년해로 하기를 바래본다. 구름다리 입구에 자물쇠 자판기나 하나 설치해 볼까나.
□부러리마을
무근성에서 배고픈 다리를 건너면 용담에서 꽤 큰 마을인 부러리와 이어진다.
병문천을 지나 부러리로 가는 길 입구
부러리 일대-부러릿동산엔 아파트가 서있다
구도심이긴 하나 시내일진데 부러리 일대엔 아직도 제주의 정취를 가진 옛 골목이 남아있다.
제주시내에서 살아 왔어도 한번도 걸어보지 않은 옛길을 걷는 기분좋은 설렘은 나들이를 계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다른 풍경이 반긴다. 그것이 즐겁다.
□구한질(구한길)
1910년대에 향교 앞에 지금의 신작로가 생기면서 예전에 한질(한길,큰길)이 구한질이 되어 버렸다.
구한질은 서문에서 부러리 마을을 지나 지금은 공항부지가 되어버린 정드르를 거치는 주 도로였다. 제주읍의 서쪽을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길이다. 이형상 목사도, 추사 김정희도 일반 백성들도 이 길을 지나다녔다.
1901년 신축교란 때 이재수는 이 길을 따라 하얀 말을 타고 입성했다. 그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한질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길도 직선으로 나 있다.
이 길은 병문내의 다리와 연결되어 있었고 건너면 들물거리이다.
지금은 한치불고기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태광식당 건물은 과거 70~80년대 삼미빵집이 자리했던 건물이다. 제주시내에서 성장한 40대 중반 이후는 다 기억한다. 애월 출신들도 빵사러 왔던 추억을 얘기한다.
제주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반'이라고 해서 작은 접시에 한사람씩의 몫으로 제사음식을 나눠 주었다. 집안 형편에 따라 '반'에 내어주는 음식종류는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웬만하면 '반'에 꼭 삼미빵이 한개씩 들어 갔다. 삼미빵은 찐빵 비슷한데 모양이 아몬드처럼 갸름했다. 팥 앙금은 많지 않았다. 삼미빵은 사올때 꼭 구덕에 넣고 왔다. 반접시엔 삼미빵 하나에 지름떡 하나, 순대, 돼지고기 적갈, 가끔 사과 같은 과일이 들어 있었다. 물론 다 한쪽씩이다. 기억이 아련하다.
좀 사는 집엔 팥앙금이 가득하고 때깔도 고급진 '고급빵'이 들어 갔다. 그나마 반개 이상은 어림없었다. 지금은 왜 그 맛이 안 날까. 제주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던 그 삼미빵이 보고싶다. 심부름 갔을 때 하얀 김을 뿜어내며 찜기에서 막 꺼내 구덕에 삼미빵을 채워 넣던 그 장면이 40년 세월을 너머 선명히 떠오른다.
□새과양
새과양은 과양(광양의 제주식 발음)에 있던 제주향교가 1827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오면서 새로운 마을이 생긴데서 연유한다. 새로 생긴 과양이라는 뜻이다. 향교와 구한질 사이의 마을이다. 아마도 향교와 연관된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다.
향교에서 새과양으로 가던 옛길을 만났다. 폭이 1.5m가 안되어 보인다. 그러나 엄연히 1914년도 지적도에도 표기된 길이고 아직도 살아 있다. 감사한 일이다. 편리함을 추구하고자하는 개발의 논리를 굳이 탓하는건 아니지만, 별 고민도 없이 도심개발과정에서의 옛길을 없에는 일이 지속적으로 있었음에도 이런 길이 제주 원도심 내엔 많이 살아 있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차가 다닐 수 없으면 건축법상 도로가 아니다. 그래서 폭이 4m이상이 되어야 도로로 인정한다. 도로는 도로일 뿐이다. 좁든 넓든 우리에겐 살아있는 길이 있다. 새과양 사람들이 향교에 갈 때 지나던 좁은 이 길처럼.
내가 길을 중심으로 제주의 역사를 바라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룡못
비룡못은 향교로 가는 길목에 있던 연못이다. 맑고 시원한 물이 용솟음쳤다고 한다. 이름으로 보아 용과 연관된 전설이 있는 듯 하다.
1914년 지적도에는 비룡못 자리에 지목이 연못을 뜻하는 지(池)로 되어 있다. 위그림의 파란색 부분이다.
70년대까지만해도 이곳에 물이 있었다고 한다. 주변에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물이 말라버려 지금은 아예 메워버리고 작은 공원이 되었다. 그마저도 중간에 새 도로가 나서 두 동강이 난 채이다. 그곳에 살던 용은 어디로 갔을까.
비룡못 물가를 지켰을 몇 그루 벚나무가 사라진 연못을 그리워하며 옛날 그 자리에 서있다.
비룡못은 없어졌지만 그 일대에 비룡길이라는 도로명으로 나마 흔적이 남았다.
□생굣질(향교길)
목사가 향교 대성전에 제를 지내러 갈때 이 길을 통해서 갔다. 위 그림에 녹색으로 표시된 길이다. 병문내를 건너 향교로 향하던 이 길은 신작로가 나고 도로가 확장되면서 일부가 없어졌지만 비룡못 아래에서부터는 남아 있다.
생굣질 서쪽 끝에는 현재 제주중학교 담벼락으로 막혀 있다. 이 곳이 예전엔 향교의 정문자리다. 제주중학교 교정은 예전 향교의 명륜당터이다. 제주의 유림들이 명륜당터에 학교를 세운 것이다.
이 자리 앞 길은 다른 옛길과 달리 상대적으로 공간이 넓다. 관덕정이나 이아 앞길처럼 사다리꼴 형태의 공간이다. 그러나 지금은 학교의 담벼락만 차갑게 서 있을 뿐 이정표도 없고 자료를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아쉬울 뿐이다.
필자가 이 학교를 다닐적엔 운동장이 지금보다 2m정도 낮았다. 지금은 성토를 해서 높여놓았다.
생교질
관청이나 향교,서원등의 정문 앞에는 홍살문을 세웠었다. 예전 향교 정문은 이런 모습일거라 상상하면서 그려보았다.
□제주향교
제주향교는 조선 태조 원년인 1392년 창건되었다. 정확히는 성균관이 세워진 것이며 교육기능을 겸비한 향교로서의 설립은 1394년 태조 3년 때이다.
애초에 교동(지금의 중앙로터리 근처)에 세워졌으나 이후 풍수해 등을 이유로 5차례 자리를 옮겼고, 1827년(순조27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제주도지정 유형문화재 2호였던 제주향교 대성전은 2016년 6월13일 국가지정 보물 제1902호로 격상됐다.
대성전은 문묘(文廟)인데 그 안에 공자(大成至聖文宣王)의 위패를 중심으로 복성공 안자(顔子, )·종성공 증자(曾子)·술성공 자사(子思)·아성공 맹자(孟子) 등의 오성(五聖)과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6현, 고려양현(高麗兩賢), 조선14현(朝鮮十四賢 ;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을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향교의 정문은 제주중 동쪽 담벼락에 있었다. 그때의 정문을 해체해서 여기로 옮긴 것인지 새로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마비가 있는걸로 봐서 해체 후 옮긴 것이라고 믿고 싶다.
향교의 하마비엔 '대소인하마비(大小人下馬碑)' 라 써있고 목관아의 하마비엔 '수령이하개하마(守令以下皆下馬)'라 쓰여있다.
향교에서는 대소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고, 목관아에서는 수령이하는 다(皆-다 개)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다.
공자를 모시는 향교에선 수령도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니 그만큼 향교의 권위가 어떠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보수작업 중이다.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도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경축행사도 열렸었다. 그러나 최근 정작 인근 주민들은 보물지정 취소를 해달라고 아우성이다. 국가지정 문화재가 되면 인근 건축물의 건축에 제한사항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요구가 이해는 간다. 일률적인 법 적용에서 과감한 유연성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어느 편을 들지는 판단이 안 선다. 남아 있는 문화재의 현 주소이다. 보존과 개발의 선상에서 결과가 어떤지는 우리는 알고있다. 현명한 해결을 기대한다.
1920년대 대성전 전경
공자를 비롯한 5성을 모시는 대성전을 문묘라고도.한다. 서울의 성균관대학교 내의 대성전을 필두로 1918년 당시 전국의 향교 수는 335개소에 이르렀다. 향교는 공자등 5성과 기타 성인에 대한 제사의 기능과 관학으로서의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198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교육기능은 사라지고 향교는 이름만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하는 기능만 남게 되었다.
제주향교 내부 시설들
계성사는 5성의 아버지들을 모시는 사당이다. 5성의 아버지까지 왜 모시는지 지금 나의 짧은 시각으론 의문이다. 모두 기원전 2~5세기 중국 인물들이다. 암튼 자식 잘 두고 볼일이다. 이천년이 넘도록 물건너 땅에서조차 잿밥을 챙길 수 있으니 말이다.
제주향교 대성전 편액
위 사진 인물들 너머로 보이는 1960년대 대성전 편액과 현재 편액을 비교하니 그때의 것과 일치한다. 제주 향교의 대성전은 1976년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니 편액에 변화가 있는지 확인해 본 것이다.
우연하게도 전국에 산재한 대성전 편액을 살펴보았다. 놀라웠다. 글씨체가 한결 같았다. 대정향교의 편액 글씨체도 마찬가지이다. 검색한 바로는 전주향교 편액의 글씨체만 달랐다.
강릉향교, 나주향교,여주향교등 숱한 향교들이 대성전 편액이 한석봉 작품이라고 자랑한다.
서울 성균관에 있는 대성전 편액이 한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언제 어느 땐가 한양의 성균관 대성전 글씨를 모태로 유행처럼 번진 것인가. 요즘으로 치면 한석봉 필체를 폰트로하여 복사한 셈이다.
그 연유가 몹시 궁금하다.
60년대 대성전 출입문
대성전 앞엔 좌우로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인 동무와 서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최근 동무와 서무가 있었던 기단석등 흔적이 발굴됨에 따라 복원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위에서 보 듯 60년대 사진에서는 서무의 끝 모습이 살짝 보인다. 60년대까지는 동무와 서무, 적어도 서무는 있었다.
단청유감.
단청은 기능적으로는 나무를 비바람과 병충해로부터 보호하는 칠공사의 결과물이다.
건물의 격과 쓰임에 따라 단청의 내용을 달리했다. 단청의 종류는 격에 따라 가칠, 긋기, 모로, 금단청 순이다. 뒤로 갈수록 화려한 단청이다. 단청을 칠하지 않은 일반집은 백골집이라고 하였다.
검소함을 표방하는 향교나 서원에서는 주로 단순한 긋기 단청을 사용했다. 성균관 대성전의 단청과 비교하면 제주 향교의 단청은 모로 단청으로 지나치게 화려하다. 건물의 격에 어울리지 않은 단청을 입힌 것이다. 문화재 복원의 기준이 있겠지만 문외한인 나로서는 가급적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리는게 맞지 않나 싶다. 성형하거나 짙은 화장없이 자연스런 그모습 그대로
□생깃동산
지금의 향교 앞을 지나 용담사거리까지의 언덕을 생깃(향교)동산이라 불렀다.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는 일대가 밭이었다.
□소로기동산
솔개가 많이 날아와 앉는 곳이라고 해서 소로기(솔개) 동산이다. 소로기동산 노인당 남쪽에는 용담2동 포제터가 있다.시내 5개동 중 포제단에서 제를 지내는 곳은 삼도2동과 용담2동 뿐이라고 한다.
□제2한천교
제2한천교 자리는 예전에 서쪽에서 이어진 길을 구한질과 연결하는 다리가 있었던 곳이다. 여기도 배고픈다리가 있었을거라 짐작해 보았다.
혹시나해서 복개된 다리 밑을 살펴보니 배고픈 다리의 흔적이 역력하다. 콘크리트가 나오기 이전엔 돌로 다진 길이었을 것이다.
□진테왓
지금은 택지 개발로 주택단지가 들어서 있어 옛날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군사들이 진(陣)을 쳤던 곳에서 유래한다. 이재수의 민병들이 제주읍성에 들어가기전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구도심은 낙후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개발을 하려하고 재생사업을 진행하려 한다. 사람이 사는 공간인지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고 옛것만 주장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옛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소중함을 모르니 무조건 파헤치려고 드는 것이다. 많이 알 수록 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그에 맞는 개발이든 재생이든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 원도심은 비록 불편하고 때론 보기 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주장한다. 길에 답이 있다고. 걷는 발길에서 느껴지는 역사의 숨결을 호흡할 때 그 가치의 무한함을 깨닫게 된다.
제주 원도심은 다행히도 도시 전체가 옛길이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 어디를 가봐도 이런 사례는 드물다. 건물은 수명이 있어 생물처럼 나고 자라고 때가 되면 낡아 없어지지만 길은 남아서 역사를 물려준다. 인간이 개발의 명목으로 파괴하지만 않는다면.
원도심의 개발이나 재생은 옛길을 보존하는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