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역사나들이길

제주원도심 제주 원도심 성곽길 탐방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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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나들이 원도심 탐방 1편●

제주시 원도심(제주읍)은 근현대의 제주읍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비록 신제주의 개발 등 도시의 확장에 따라 신도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 역사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특히 제주의 옛길은 새로운 도로의 개설과 확장에도 불구하고 90프로 이상이 남아있어 보존의 가치가 매우 높다고 생각되며 이 길을 통해서 공동화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제주 원도심의 활성화 계기가 충분히 될 수 있을 것이다.

전국적으로도 제주시처럼 원도심 전체가 옛길이 살아 있는 곳은 거의 없으며 그만큼 제주 원도심이 가지고 있는 옛길은 엄청난 문화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새로운 관광 콘텐츠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쉽게도 탐라문화광장 조성의 사례에서 보듯 사려깊지 못한(? ) 무분별한 원도심개발이 소중한 옛길들과 역사적 흔적들을 단시간에 없에버리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제주면(제주읍)


1914년 제주면 중심부 지적도 - 출처 '국가기록원'

독립국가였던 탐라국은 1105년 고려에 복속이 된다. 제주(濟州)라는 명칭은 1211년 고려 희종때 탐라현(耽羅縣)을 물 건너에 있는 고을이라는 의미로 제주(건널 濟 고을 州)로 명명하였다. 바다 건너에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 후 몽골의 침략으로 삼별초의 난이 정벌된 이후(1273년) 원나라는 자기네 영토로 복속시키면서 탐라총관부를 두어 명칭을 제주에서 탐라로 다시 변경하고 목호들을 두어 말생산기지로 활용한다.

그 후 1294년 고려에서 탐라에 대한 소유권을 제기하여 제주라는 명칭을 회복하고 형식상 다시 고려에 환원되기는 하나 명분상 일 뿐 100여년간 원나라의 실질적 지배를 받는다. 후에 목호의 난(1374년)에 의해 원나라의 세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비로소 고려로 실질적인 환속이 된다.

1416년(태종16)에 한라산을 경계로 북쪽에 제주목을 두어 목사를 파견하고 남쪽을 두 군데로 나누어 대정현과 정의현을 두고 현감을 파견한다.

1896년에 전라남도 소속의 제주군, 정의군, 대정군이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 때 정의군과 대정군, 완도군 추자면이 제주군으로 병합되고 1915년 도제(島制)실시후에 제주도(濟州島)라 했으며 1931년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이 된다.

1946년 도제(道制) 실시로 제주도(濟州島)가 제주도(濟州道)로 변경되어 전라남도 관할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1955년 9월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이 된다.

■제주읍성(제주성)

읍(邑)이라는 말은 성으로 둘러싸인 백성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주면이 제주읍으로 승격될 때와 같이 행정구역상 명칭인 읍과는 동일한 단어를 쓰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 정의읍성, 대정읍성도 같은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큰 도읍의 성을 도성(예,한양도성)이라고 하는데 제주읍성의 지도 중 하나인(위 사진)'제주목 도성지도'에서도 '도성지도'라 했고, 이형상목사의 탐라순력도에도 역시 '제주도성'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제주읍성이 그만큼 지역적으로 중요함을 강조한것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이왕이면 제주도성으로 칭하는게 맞다고 생각해보지만 일반적인 명칭인 제주읍성 또는 제주성으로 해서 글을 이어 가려한다.


제주성지 추정도 - 출처 '제주성지보존관리 및 활용계획(제주시)'

위 그림에서 보듯 제주성은 1914년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현단 일대에 복원한 구간과 잔존구간 약 100m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1910년에 일제가 전국에 읍성철폐령을 내린 이후 1914년부터 훼철되기 시작하고 1920년대에 제주항 건설에 성곽의 돌들을 가져다 쓰는 바람에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잘 안쓰지만 1970년대까지만해도 제주에선 '성안 간다', '성안 사람' 등 '성안' 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그 성안이 바로 제주성 안쪽 지역을 일컬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문밖에 북쪽으로 붙은 동네를 '무근성(묵은성)'이라고 부른다.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제주성이 지어지기 전 5~6세기 경에 탐라국의 옛성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항공사진으로 본 제주성곽자리 추정도 -출처 '제주성지보존관리및 활용계획'



1914년 지적도를 바탕으로한 제주성곽과 당시 옛길

현재는 성곽이 있던자리에 대부분 도로가 나 있으며, 성곽안쪽에 나있던 샛길과 이어져 있다.



현재 제주성내 남아있는 골목길 현황과 명칭- 출처'제주성지보존관리및 활용계획'

이 길을 따라가면서 탐방코스를 만들어 보았다.


성곽터(붉은색)와 간선도로 옛길ㅡ현대식 표현으로 내부 순환로

서문ㅡ서문한질ㅡ서불막골ㅡ이앗골ㅡ두목골ㅡ검정목골ㅡ동문한질ㅡ동목골ㅡ칠성골ㅡ관덕정앞 ㅡ서문한질 로 이어지는 순환로와 남문에서 관덕정까지 이어진 한짓골이 주요 길이다.

위 그림에서 추측할 수 있는 건 제주에 온 유배객이나 관리들 일반 백성들 모두 동문을 지나 칠성골(지금의 칠성로)을 거쳐 제주목 관아를 갔을 것이다.

정말 유서가 깊은 길이 아닐 수 없다.


주요도로에서 실핏줄처럼 이어진 골목길

주요도로에서 각 동네와 집들을 연결했던 길이다. 이 길들이 원래 올래라 불렸다. 지금도 이 길들이 90프로 이상 남아 있어 다행이다.

이 중 관덕정과 동문으로 이어지는 칠성골과 또 다른 길인 구명골은 왕래가 빈번한 길이었다. 현재 칠성골에 칠성로 상가가 형성되어 있고, 구명골 역시 길을 따라 동문재래시장이 들어서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제가 관덕정에서 동문으로 향하는 신작로를 만들기 전에는 이 두 길이 성안에서 아주 중요한 길이었다는 방증이다.


70년대초 관덕정 일대-출처 '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제주도)'

필자가 명칭을 붙여 보았는데 원래 성곽이 있던 자리가 길이 된 곳은 성곽터 길이라 명하고, 이 성곽터 길과 성곽 안쪽을 따라 원래 있던 샛길(서문샛질, 남문 샛질),그리고 성벽을 따라 비교적 최근에 새로난 길을 합쳐 성곽길이라고 해보았다.


(즉, 성곽길=성곽터길+샛길+신설된 길)

본 글에서는 성곽길이라는 용어를 쓸 예정이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된 기사에 의하면 성곽길을 '성굽길'이라는 표현을 쓴다. 원희룡지사가 참석한 성굽길 걷기행사등이 진행되기도 했다. 정식명칭화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다르게 생각한다. 원래 성굽길의 뜻은 '성이굽어 돌아가는 모서리에 있는 길'이다. 후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동,서,남문 모두 성문 앞에 성굽길이 있었으며 현재 동문터와 서문터에 성굽길이 남아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성곽길이 맞는 표현이지 성곽길 전체를 성굽길로 쓰는건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주 성곽길 탐방로

출발은 관덕정 앞에서 시작한다.

서문터 및 서문 성굽길ㅡ성내교회ㅡ구 제주극장ㅡ화교소학교 ㅡ남문터ㅡ오현단 및 제주읍성지ㅡ제이각(청풍대)ㅡ가라쿳물터ㅡ남수각터(남수구터)ㅡ남측성곽옛길ㅡ동문터ㅡ동문 성굽길ㅡ기상청입구 잔존성곽구간ㅡ공신정터ㅡ고씨가옥ㅡ북초등학교북측길ㅡ서문ㅡ관덕정으로 이어지는 코스이다.

■ 관덕정

관덕정 앞 광장은 옛날 관아 내의 활쏘기를 했던 넓은 공간으로, 제주의 근현대를 비롯한 제주의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제주의 역사적 중심공간이다.


1902년도 관덕정-출처 '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제주도)'

1902년도의 관덕정 사진에선 구한말 망국으로 이어지고 있는 나라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어 처연함을 자아낸다.


1946년도 관덕정 - 출처 '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제주도)'

해방 직후의 관덕정의 모습은 일제가 보수하면서 처마길이가 2척이나 짧아져 원래 건물의 비례가 안맞을 뿐더러, 짧아진 처마로 인해 빗물이 들이쳐 건물부식이 가속화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관덕정의 현재모습


1900년대 초 관덕정 앞 거리- 출처 '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제주도)'


1950년대 관덕정 앞 거리 - 출처 '한국향토문화대전'


1968년 관덕정 앞 거리-출처 'KTV 화면 캡쳐'


현재(2018년5월)관덕정 앞 거리


1960년대 관덕로(관덕정에서 동쪽방향) 사진 우측끝에 우생당간판의 '우'자가 보인다.


현재의 관덕로(동쪽 방향)


관덕정 건너편에 일제때 적산가옥이 현재까지 남아 '수나(soona)'라는 카페로 영업중이다. 내부엔 일제때의 가옥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하니 탐방길 시작이나 끝에 방문해도 좋을듯하다.

■ 관덕정 서쪽에 자리했던 제주시 청사


시로 승격(1956년 9월1일)이전의 제주읍 사무소-출처 '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제주도)'


옛 제주시청사(1959~1980)-출처'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제주도)'


헐리기 전 옛 제주시청사


현재 옛 시청사를 헐고 들어선 공영주차장

옛시청사는 민간에 매각되어 2012년 철거된다. 근현대 건물도 문화재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을텐데 철거를 막을 방법은 없었는지 아쉽기만 하다.



현재의 서문로 ㅡ 60년대 사진과 비교하면 그때보다 더 보행자가 없다 . 위의 60년대 사진 우측의 당구장표시가 있는 건물이 현재사진 우측에 있는 주황색 건물인것 같다.

■서문터


서문이었던 진서루의 옛모습 - 서문에는 원래 백호루라는 명칭의 누각이 있었으나 후에 진서루로 이름이 바뀐다.


서문이 있었던 자리ㅡ지금 관덕로의 서쪽 끝자락에 있었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성문과 연결되어 있던 성굽길만 남아있다



서문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여인궁 건물 중앙하단)ㅡ한라일보에서 주관하여 제주시내 곳곳에 유적지 표지석을 세웠다. 의미있는 작업을 한 한라일보에 감사를 드린다. 아쉬운건 서문과 동문터의 표지석이 잘못 위치한것 같다. 둘다 공히 원래위치보다 50미터정도 북측에 있다.

■서문 성굽길


1914년 지적도를 보면 성굽길이 명확히 보이며 현재 도로확장으로 길이는 줄어들었지만 남아있다.


빨간원 안의 노란표시 골목길이 서문 성굽길이다 - 출처 '네이버 지도 위성사진'


사진속의 늘푸른 인력개발 좌측으로 들어가면 송림반점앞길로 돌아 나온다.

성굽길엔 동,서,남문 공히 돌하르방이 서 있었다.

서문에는 6기가 서 있었는데 그 중 4기는 관덕정 네귀퉁이에 옮겨졌고 2기는 민속자연사 박물관입구로 옮겨졌다.


성굽길가에 있는 60여년 전통의 송림반점 ㅡ50년대에 화교가 처음개업하여 지금 주인장께서 79년에 인수하여 아직도 영업중인 40년된 내공의 중국음식점. 성곽길 탐사에 앞서 궁극의 짜장맛을 보고 가는것을 추천.

서문다리 옆 횡단보도를 지나 삼화종합철물 좌측길이 성곽길 코스의 시작점

■성내교회

성내교회

1908년도에 입도한 이기풍목사가 옛 관청건물인 출신청(군사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을 매입하고1910년에 설립한 제주 최초의 기독교회이다. 현재 건물은 1975년도에 건립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후에 조천교회, 성읍교회등을 건립한다.

■ 구 제주극장


구 제주극장(옛 조일구락부)

1943년 일본인이 '조일구락부'를 설립하고 황순하선생(오현학원 설립자)이 감사를 맡는다.

1944년 무성영화와 유랑극단의 공연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하였고 1944~

1947년까지 조일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어진 제주 최초의 현대식 극장이다.

이곳은 해방 이후 민주주의 민족전선, 대동청년단, 조선민주청년동맹,서북청년회 제주도지부 등의 창립식이 이루어진 역사적 공간이다.

또한 당시 상영된 무성영화의 변사가 제주 최초의 영화인이자 가수 혜은이의 부친으로 알려진 고 김성택씨이다.

1948년 정식공연장으로 허가를 받아 '제주극장'으로 공연과 영화상영을 시작했고 1953년 영화전용관으로 재개관한다. 그 후 1978년 극심한 경영난으로 폐업 이후 '현대극장'으로 탈바꿈하였고 현대극장마저 폐업하여 지금은 안전진단 E등급 판정을 받아 사용되지 않고 있다가 최근(2019년1월) 철거되었다. 제주의 유서깊은 문화적 건축적 자산이 허무하게 사라진 것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예전의 제주극장


이효리도 다녀갔다는 제주극장 맞은편 모퉁이 옷가게 ㅡ도로확장으로 잘려진 건물 나머지를 멋들어지게 꾸며놨다. 원도심 재생의 긍정적 신호라는 생각이 든다

■화교소학교


화교 소학교 ㅡ 1965년 대만 정부의 승인을 받아 화교들이 설립

1920년대에서 1950년까지 일부 화교들이 기술자로서 일시적인 체류계를 위한 계절이민을 간간히 오긴 했으나 그리 많은 수가 아니었다.

1950년 중국 요녕성 장하현의 지주가족 54명이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해상호를 타고 대만으로 가던 중 조난을 당한다. 그 해 8월 인천에 도착한 후 다시 남하 하다가 완도근처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배가 파손되고, 한국군함이 인도적차원으로 산지천에 예인하였는데 생존자는 22명이었다. 그 후 배안에서 8년간 시장의 버려진 야채로 연명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나 지금은 어엿한 제주인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다.

중국인은 중국식으로 교육을 받아야한다는 화교들의 집념으로 1965년에 대만정부의 공식 인가를 받아 설립된 소학교이다. 지금은 운영되고 있지 않지만 제주에 정착한 화교들의 끈질긴 삶의 의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산지천하류에 예인되어 정박해 있는 해상호

■남문으로 가는 성곽길


남문으로 향하는 성곽길


가는 길 중간에 성곽하단부에 쓰였을법한 큰 기단석들이 오래된 주택의 담벼락에 보이는데 제주성 성곽의 흔적으로 짐작한다


남문 샛길가는 길


남문 샛길 입구


남문샛길가에 성곽 잔존물로보이는 돌담 ㅡ하부에 큰 돌이 기단석임을 짐작케한다

남문샛길 골목안 풍경


남문 샛길안 올래


제주성 잔존 성곽

■남문터



남문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구한말 남문 -남문위에는 정원루란 누각이 서 있었다


항골 입구(길건너)

남문터를 지나 조금 더가면 길건너 중간의 작은길이 '항골'로 불리던 옛길이다. 현재 교통 흐름의 효율화를 위한 것이겠지만 아쉬운점은 서문터도 그렇고 여기서도 횡단보도를 돌아서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당국과 협의하여 성곽길 순환로 상에 있는 도로에 바로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를 기대해 본다.


오현단으로 가던 항골 옛길

■오현단 및 제주성지


복원된 제주성

항골의 좁은 골목길을 돌아 나오면 오현단 서측 입구의 복원된 제주성의 일부가 자리한다.


오현단으로 들어서는 길


오현단 후문에 위치한 복원된 귤림서원건물

미안하지만 복원된 건물이라 귤림서원이 있었다는 표지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이 좁은데서 공부를 기르치고 배웠을지 의문이다.


오현단 경내


'증주벽립(曾朱壁立)' 마애 금석문

오현단 경내에 있는 송시열의 글씨 탁본 '증주벽립(曾朱壁立)' 마애 금석문이다. 증자와 주자가 곁에 벽처럼 서 있다는 뜻으로 이를 가까이 새겨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오현의 다섯개 비석 오현(五賢)이라는 다섯명의 현인들의 명성(?)에 맞지 않게 소박하다.

오현 다섯 분 모두가 제주사회에 공헌한 위대한 분인가에 대해서는 각자 판단하시길 바란다.

송시열이 당대 서인의 노론 거두로서 다섯분이 모두 서인 출신 또는 서인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이란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할 것이다.

■가라쿳물 터


가라쿳물 길-출처 '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제주도)'


가라쿳물-출처 '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제주도)'

물이 귀했던 제주읍내에선 가라쿳물이 소중한 식수원이었다.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어린 나이에도 물허벅을 지고 나르던 저 소녀에게서 제주인의 척박한 삶과 강한 생활력을 느껴본다


가라쿳물이 있던 자리ㅡ지금은 아스팔트로 묻혀버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제주성지


제이각 옆에 위치한 옛날 창고식 건물


복원된 남문 동치성


동치성 위에 복원된 제이각


복원된 제주성 상단의 모습ㅡ전투시 꼭 필요한 여장(여장ㅡ활이나 총을 쏠때 몸을 숨기기 위한 개구부가 있는 담장)이 없어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복원된거라 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제주목 도성지도의 제이각(청풍대)와 남문의 모습(상) 과 산지천 중인문 주변 간성의 상단(하)의 여장ㅡ분명히 이 지도에는 성곽 상단에 여장이 분명히 보인다


1900년대 초 제이각에서 바라본 남수각 남쪽 동네


제이각에서 바라본 남수각 남쪽동네의 현재모습

■남수구(남수각)


남수구의 옛 모습


남수구가 위치했던 자리 ㅡ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산지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남수구와 북수구를 두었다.

남수구는 하부에 홍예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어 남수각이라 불렀다. 즉 남수구는 남수각과 홍예다리로 이루어진 셈이다. 홍예다리는 위 옛 사진에서 보듯 두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다리였으나 지금은 사진으로 밖에 만날 수 없다.

■ 남측성곽 옛길


오현단과 제이각 사이에 동쪽으로 나있는 오현교 ㅡ 이 다리를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빠지는 좁은 샛길 입구가 나온다


사진 하부중앙에 보이는 작은 계단길이 옛날 남수각을 통행하던 길로 보인다


오현교 지나자마자 나오는 샛길 입구 -이 샛길로 진입하면 남수각을 오가던 좁은 계단과 골목길이 나온다


좁은계단을 올라서면 옛 성곽의 흔적이 나오는 옛길로 들어서게 된다


옛길에서 마주하는 옛 성곽의 흔적


남측 옛 성곽길은 폭이 2미터 남짓하고 알록달록한 색깔의 벽화로 꾸며져 있다.


샛길을 따라가다가 길이 막힌다. 예전에는 이 길이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주택 담벼락에 있는 잔존 성곽


너무나 정겨운 남측 성곽 옛 골목길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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