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역사나들이길

위미 위미리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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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풍요로웠던 위미리 마을 안길을 걸으며 노란 감귤과 함께 농익어가는 제주의 가을 풍취를 만끽할 수 있는 길이다.

■위미리

위미리 전경-출처 네이버 지도

위미리는 제주 대부분의 해안 마을이 그렇듯 해안변에서 중산간 지역까지 길게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북쪽에 큰동산·족은동산·쇠동산이 있는데 쇠동산의 지형 지세는 마치 소가 누워 있는 형태이고, 족은동산은 소의 꼬리와 닮았다고 하는 데서 쉐미, 뛔미, 뛔밋개등으로 불렸고, 한자로 우미촌(又尾村) 또는 우미포(又尾浦)로 표기하다가 위미(爲美)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해양성 온대 기류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온화한 기후로 감귤·원예 작물의 노지 재배가 가능하여 예전부터 풍요로운 곳이다.​

■위미 동백나무군락

현병춘(1858~1933) 할머니는 17세때 시집을 와 어렵게 모은 돈으로 황무지(속칭 버둑)를 매입한다. 이 땅을 옥토로 개간하면서 주변에 한라산에서 채취한 동백씨를 심어 방풍수로 키운게 오늘의 동백나무 군락이다.

1982년에 도지정 기념물 39호로 지정되었다



위미 동백나무 군락

위미리 904~6번지 일대를 병풍을 친 듯 100년도 훨씬 더 산 키높은 토종 동백나무가 무성하게 둘러싸고 있다. 제주의 토종 동백은 3월초부터 멋들어진 동백꽃의 향연을 보여준다.

동백

동백나무는 주로 섬에서 자라는데 동쪽으로는 울릉도, 서쪽으로는 대청도까지 올라간다. 육지에서는 해안가 지역인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마량리, 내륙에서는 지리산 산록에 위치한 화엄사 경내에서 자라는 동백이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전북 고창군의 선운사 경내에서 자라는 동백나무 숲이 유명하다.


애기동백-출처 국립중앙과학관

위미동백나무 군락지를 찾는 이들은 동쪽으로 500미터쯤 떨어진 제주동백수목원과 많이 혼동한다. 이 곳의 동백은 원산지가 일본인 애기동백을 심어놓았다. 12월~1월초에 만개하여 볼거리를 제공한다.

토종동백은 꽃이 통째로 툭 떨어지는데 애기동백은 잎이 낱장으로 떨어지는 특징이 있다.

동백기름은 동백씨앗을 날 것으로 짠 것과 볶아서 짠것 두가지가 있다. 날 것으로 짠 기름은 연한 노란색이며 볶아서 짠 것은 짙은 갈색을 띈다.

날 것으로 짠 기름은 미용이나 칠등 기타용도로 쓰고 볶아서 짠것은 식용이나 약용이다.

동백기름은 예전엔 머릿결을 가꾸는데 주로 썼으며 피부보습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약용으로는 기침등 기관지 관련 질환에 효험이 있어 상비약으로 구비했었다.

■위미리 올레 5코스길


위미중앙로 246번길

위미 동백나무군락을 나와 다리 건너 하천길(위미중앙로 246번길)을 걷다가 바닷가로 향하면 올레5코스 길과 만난다.

제주에선 봄에 유채꽃이 지천이라면 탐스런 귤의 노란 자태가 가을 제주 들녁을 수놓는다.

이 곳 위미는 온화한 기후로 인해 귤재배에 최적지인 만큼 마을이 온통 귤밭을 품고 있다.


올레 5코스로 이어지는 골목길

돌담으로 이어진 이 길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면 올레 5코스와 만난다.


올레5코스 이정표

올레 5코스 위미리 구간은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오솔길이다. 이 길은 위미항으로 이어진다.

올레5코스 위미 해안가 절경

올레5코스 위미 해안가 절경

올레5코스 위미 해안가 절경


올레5코스 위미 해안가 절경


몽돌(작지)해안이 군데군데 맑은 바다를 품고, 자갈 사이로 부서지는 하얀 포말은 드넓은 태평양의 수줍은 끝자락이다.

제주 남부의 해안은 북부와는 사뭇 다른 풍광이다. 해안절벽이 많고 주상절리도 발달되어 있다. 북부의 지질은 현무암의 다공질이라 물이 스며들어 지하에 머물지만 서귀포 일대는 물을 흐르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삼다수 공장은 북쪽 교래리에 있고, 천지연,천제연같은 폭포는 서귀포에 있는 것이다.

제주에선 드문 논농사가 서귀포(하논)에선 가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위미항 동방파제

해안가 길을 걷다가 잠깐의 숲길을 거치면 곧 국가어항인 위미항 동방파제가 눈에 들어온다.



바다에 비친 윤슬

제주 남부의 바다는 해와 마주해 은빛으로 반짝이니 눈이 부시다. 당연히 달빛의 윤슬보다 강렬하다. 이중섭이 은박으로 된 담배포장지에 그림을 그린 것이 가난에서 비롯된 작가의 우연이 아니라 눈에 비친 은빛 바다와 결부되어 있다면 나그네의 지나친 억측일까.

제주시에선 해를 뒤로 하고 바다를 바라보니 반짝이는 바다를 볼 수 없다. 제주시에선 한라산이 남쪽이고 바다가 북쪽인데 여기선 그 반대이다. 어릴 적 처음 서귀포에 갔을 때 방향감각을 잃고 마냥 신기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조배머들 코지

조배낭(구실잣밤나무)가 있는 돌무더기(머들)가 바다로 돌출된 곳(코지)이라하여 이름이 조배머들코지이다.



조배머들코지

한라산이 내뿜은 용암이 바다와 만나 생겨난 거칠은 바위들은 숱한 전설을 낳았다.

조배머들코지의 바위들은 1986년 위미항이 국가어항으로 지정되면서 개발의 시련으로 제 모습을 잃은 채 방치되거나 묻혀 있었다.

서귀포시가 2006년 지역 주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배머들코지 복원계획을 수립하고

2011년에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주변엔 산책로와 경관 조명을 설치하여 올레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머들코지 주변 연못

바다로 향했던 조배머들코지는 위미항개발에 따른 매립공사로 육지에 갇혀버렸다.이 마을 사람들은 그 아쉬움을 달래 듯 코지 주변에 물을 가두어 연못을 만들었다. 바닷물 대신 용천수로 채워진 이 연못은 맑아서 수생식물이 물속에서 푸르름을 머금고 있다.


거북바위

거북을 쏙 빼닮은 바위가 막 물에 들어가려는듯 물가에 서성인다.


해국

해국 무더기가 연못 주변에 가을의 전령으로 가득 피어있다. 우리나라 중부 이남 바닷가에 자생하는 가을 꽃이다.



위미 포구 전경

예전의 포구였던 앞개가 보인다. 머리에 구름을 인 한라산이 포구너머로 산자락을 드러낸다.


보호수

1991년도에 수령 150년으로 풍치목으로서 보호수로 지정된 후박나무가 옛길을 지키고 서 있다. 1990년 현재 국내 총 보호수는 9,366수라는데 제주에도 꽤 많은 보호수가 산재해 있다.


연디동산

예전에 연대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연디동산의 옛길이다. 위미리 대화동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지대가 높으니 연대가 있었을 법하다.


위미성터 표지판

연디동산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길가 모퉁이에 글씨가 거의 다 지워진 표지판이 보인다. 4.3때 위미성이 있었다는 성터를 알리는 표지판이다. 네이버지도에도 위미성터라고 표기된 지점이다. 성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정작 위미성은 위미초등학교 뒷담으로 남아있다. 위미성을 찾는 이들이 종종 헛걸음을 한다. 정확한 안내가 필요해 보인다.



알동네 정경

위미 대화동 알동네 '구린질(길)'일대이다. 제주시 무근성에도 구린질이라는 명칭의 길이 있는데 그 뜻이 궁금하다. 청량한 가을햇살이 동네를 편안하게 감싸고 있지만 제주의 여느 마을처럼 오가는 이는 드물어 한적하기만 하다.



어느 집 정원의 감나무와 가을 꽃

정갈하게 정돈된 마을 길에서 마주하는 가을의 풍경이다. 잘익은 감들은 파란 하늘에 걸려 있고 어느집 마당에 붉은색 꽃이 지나는 길손을 환하게 반긴다.


마당의 귤

앞개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집 마당에 심은 귤나무에서 농익은 귤이 쏟아질 듯 밖으로 매달려 있다. 이 계절엔 지천이 감귤인지라 누구도 몰래 손대려하지 않는다. 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한 우리네 가을 정경이다.


앞개(전포)

마을 앞의 포구이다. 수심이 깊고 넓어 천연항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국가어항으로 개발된 지금의 위미항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일제시대에는 제주와 일본 오사카를 오가는 정기여객선의 기항지였다고 한다. 당시 오갔던 정기 여객선은 1천톤급의 제2군대환(기미가요마루)을 비롯해 4척이나 되었다. 위미리가 그만큼 당시 제주 남부의 부촌이자 중심지였다는 방증이다.


개발된 위미항 전경


돈지 일대

앞개 바로 아래에 '돈짓선왕'을 모셨던 돈짓당이 있던 곳이다. 예전 지명이 돈지인데 지금은 개발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안전과 풍어를 기원했던 그 정성은 아직도 이곳을 오가는 배들에 변함없이 닿고 있으리라 믿는다.





위미 대화동 일대 정경

앞개에서 카페 서연의 집으로 가는 옛 길이다. 위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길이라고 점수를 매겨 본다. 서연의 집으로 향하는 올레5코스 길에 밀려 발길이 뜸하지만 꼭 걸어 보길 권한다.


한라산과 감귤밭

제주의 가을을 대표하는 풍경을 이곳에서 마주한다. 비록 한라산 정상이 구름에 살짝 가리긴 했지만 맑은 하늘은 잘 익어가는 귤에 가을 햇살을 스며들게해 달고 시원한 명품 감귤을 만들어 낸다.



상점

지금은 낡고 허물어진 채 버려진 듯 방치된 동네 점빵이다. 예전 어느 날엔 이 동네 꼬마들이 10 원짜리 동전 하나 들고 문턱이 닳도록 드나 들었을 것이다. 잘 가꾸어 추억을 소환하는 장소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새마을 창고

'80년 새마을 농특저장고'라는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다. 지금은 좁은 길이지만 당시엔 농산물을 가득 실은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서연의 집 뒷편의 옛 길

굳이 설명할 필요없이 이 길이 주는 편안함에 걸음이 느려진다. 걷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을 새삼 누려본다.


어느 집의 마당

바다를 마당인 듯 품고 있는 집을 본다. 유명한 서연의 집 뒷편 골목에 위치한 집이다. 활짝 열린 대문(대문이라고 할것도 없지만)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남녘바다의 윤슬이 일품이다.

자연과 삶이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절로 건축적 감동을 느끼게 하는 집이다. 사계절 변화 무쌍한 바다를 마당으로 쓰고 있으니 평수를 짐작하는건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카페 서연의 집

카페 '서연의 집'은 ​2012년에 개봉된 영화 '건축학개론'의 주인공 서연의 고향집으로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했던 촬영지이다. 원래 오래된 구옥을 촬영용 세트장으로 개조했다가 태풍으로 손상된 것을 다시 건축하여 카페로 쓰고 있다.



영화에서의 건물과는 좀 다르지만 카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영화속 주인공이 되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올레꾼들이나 젊은 여행자들이 성지순례하듯 꼭 들르는 집이다.


가운디썰

한라산의 용암은 위미리 바닷가에서 거친 파도를 만나 제각각의 조각품으로 자리했다. 옛 지명인 가운디썰 너머 멀리 서귀포의 새섬이 빼꼼 머리를 드러낸다. 이 근처에서 연안김씨 집안이 300여년 전에 위미리에서 제일 먼저 터를 잡았다고 한다.


초가와 귤나무

제주에선 이제는 전통적인 초가를 만나보기가 힘들어졌다. 더구나 주민이 거주하는 집은 더욱 드물다.

위미리 마을 길에서 빨랫줄에 빨래가 걸려있는 옛 초가를 만난다. 무장대에 의해 마을이 전소될 때도 불타지 않고 남은 집으로 보인다.

돌담 너머로 잘 익은 감귤이 길손을 반긴다. 모진 세월과 시련을 견디면서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 소박한 초가가 언제나 이 모습 그대로 남아있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대화동 마을 길

■위미 4.3성(성담)


4.3성 유적지 표지판

위미리는 4·3 당시 무장대로부터 두 차례의 습격이 있었다.

4.3의 광풍이 절정으로 치닫던 1948년 11월 28일 새벽에 산속의 무장대는 평온했던 위미마을을 습격한다.

당시 폭도로 불리던 무장대는 군경의 토벌작전이 심해지면서 식량등 물자부족에 시달린다. 겨울을 앞두고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위미마을을 습격하여 무차별적으로 가옥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이 날 어린이를 포함한 위미리 주민 22명이 무장대에 의해 목숨을 잃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방화로 당시 위미리 가옥 350여채 중 10여호를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집도 옷도 식량도 모두 불타버린 마을 주민들은 겨울을 앞두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마을 위 중산간 가까이에 있었던 대성동과 종남밭, 종정동, 웃뙤미, 망앞 등의 마을 주민들도 본 마을 석성 안으로 소개되었고 종남밭 주민들은 4.3이후에도 마을로 돌아가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북촌이 토벌대에 의해 엄청난 희생이 있던 마을이 었다면 위미는 무장대에 의한 희생이 컸던 곳이다.

그해 12월31일에 무장대는 다시 위미마을을 습격한다.



위미 4.3성

위미 마을주민들은 1차습격 이후 민보단을 조직하여 경찰지서의 지시에 의해 대규모 성을 쌓아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하였다.

4·3성 축성 사업에는 마을의 모든 남녀노소가 참여했다. 성곽은 위미1리 전포교 앞에서부터 '밍금'까지 이어졌고 위미초등학교 뒤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서광사 '마메기' 앞 '흙통폭낭' 뒤쪽을 거쳐 위미2리사무소와 '벌러니 코지'까지 2.7km정도 이어졌다고 한다. 이 성곽은 당시 2개월의 대역사 끝에 이루어 졌으나 지금은 과수원의 밭담으로 되돌아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현재는 위미초등학교 뒷담으로 이용되고 있는 3백여m의 4·3성이 남아있다.


4.3성의 담쟁이

4.3으로인해 위미리 주민60여명이 희생되었으며 , 이로인해 산간부락과 위미 본 마을 사람들간에 불신의 골이 깊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이유로든 4.3은 엄청난 시련과 희생을 남기고 깊은 상처를 주었다.

아직도 정명이 되지않은 4.3추모공원의 백비가 말해주 듯 4.3의 아픔은 완전히 아물지 않은 채로 진행형이다. 그나마 많은이들의 노력으로 화해와 상생의 이름으로 억울했던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져 다행이다.





위미리의 옛길 정경

새로 난 길 틈새로 옛길이 이어져 있다. 걸어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위미 마을에선 어디서나 집 담벼락에 기대어 선 귤나무가 가을 정취를 단장하고 있다.


잣굽담

돌담을 쌓는 형태에 따라 담장의 명칭이 있다.

그 중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부에 작은 돌을 쌓고 그 위에 큰돌을 쌓은 것을 잣굽담이라 한다.배수기능을 좋게 하기 위해서라는데 납득이 잘 안간다. 아마도 고르지 않은 바닥 때문에 큰돌을 쌓기위해 작은 돌(작지, 작, 잣)을 먼저 깔아 기초를 쌓은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벚나무 가로수

4월초면 제주의 봄에는 만개한 왕벚꽃의 향연이 일품이다. 제주시의 전농로 못지 않게 위미리 마을을 지나는 일주도로변 벚꽃길도 봄에는 장관을 연출한다.




어느덧 출발지인 동백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10km정도의 여정이다. 위미리의 마을길은 봄에는 귤꽃향과 더불어 또다른 색으로 나그네들을 반길 것이다.

위미리 마을길 꼭 한번 걸어보길 권하며 행복했던 위미리 여정을 마친다.


입회비 및 후원계좌 : 제주은행 6901008085
(예금주:사단법인 제주문화역사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