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갑마장 가시리 쫄븐갑마장길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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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코스는 가시리 녹산로 일대 '쫄븐 갑마장길'로서 예전에 말을 기르던 갑마장이 있던 지역으로 가시천과 따라비오름, 잣담(잣성)을 아우르는 길입니다.
■제주의 말이야기
우리나라의 재래마는 체구가 작았다. 체고가 3자(90cm)정도였고 주로 농경에 이용되었다. 토마,향마,국마등으로 불렀다. 중국의 문헌에선 말을 타고도 과일나무 밑을 지난다고 해서 과하마(果下馬)라고 칭한 기록이 있다.
지금의 제주마는 체고(어깨높이)가 암말은 117cm,숫말은 115.5cm정도이다.
'달단마'라고도 불리는 몽골말은 키가 4자~4자반(120~135cm)이고, 서역의 대완마(대완-지금의 우즈베키스탄)는 6자~7자(180~200cm)로서 덩치가 크고 몸집이 날렵한 말이었다.
몽골이 말 생산기지로서 탐라를 지배하는 100년간 재래마인 토마, 달단마, 대완마, 그리고 이들의 혼혈종인 조랑말이 혼재하였다. 이들 말이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제주의 지형과 기후에 적응하여 제주 고유의 독립된 혈통인 제주마가 생겨난다.
제주마의 우수성은 태조 이성계가 타고 다녔다는 8마리의 말(팔준마八駿馬)중 '응상백'이 말해준다.
세종은 조선 3대 화가 중 하나인 안견에게 팔준마의 그림을 그리게 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찬(贊=인물이나 사물을 기리어 칭찬하는 글)을 짓게 했다고 한다.안견의 팔준도는 현재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현존 화첩은 안견의 팔준도를 승계한 조선후기 작품으로 작자는 미상이다.
예전에 제주읍 일도리 일대 사라봉 기슭을 끼고 넓은 지역에 고수(古藪)라는 마장(馬場)이 있었다. 마장은 수천 마리의 마필(馬匹)을 방목하였다. 보통 고마목장으로 언급되어진다. 말들이 넓은 초지를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영주 12경의 하나인 고수목마(古藪牧馬)라 하였다. 지금은 일도이동 주민센터 근처 '고마로'라는 지명으로만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우수한 제주말들은 징발이나 진상, 관리의 수탈로 인해 씨가 마르게 되고 점차 왜소하게 변모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위사진이 그의 방증이다.
현임종의 회상기 '속 보고 듣고 느낀대로'에 의하면 해방 후 제주에선 일본군이 타던 호마(胡馬-중국 동북부지역의 크고 날렵한 말)들을 두고 갔는데 일반 민가에 분양한 적이 있다. 그러나 호마는 먹이도 많이 먹을 뿐더러 촐(풀, 건초)은 잘 안 먹고, 사람도 먹기 부족한 콩,보리등을 주어야하고 밭일에도 다루기 쉽지 않아 식용으로 처리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간 제주마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달리 없다가 1986년에 제주마를 천연기념물 347호로 지정하여 보호, 육성대책을 실시하였다.
1990년 제주에 경마장(현 렛츠런파크)이 생겼고,경주마는 순수 제주마로 국한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경주마로 순수 제주마를 활용하기엔 개체수도 부족하고, 경마로서의 재미도 반감되는 문제가 생긴다. 결국 제주마와 서양의 더러브렛 종의 혼혈종인 '한라마'도 경주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한라마는 제주마의 특성과 더러브렛의 날렵한 체형을 고루 갖추고 있어 승마용으로도 인기가 많은 종이다.
그러나 점점 더러브렛의 피가 더 많이 섞인 한라마들이 나오면서 체격이 커져 경마에 체고를 제한하기에 이른다. 결국 2023년에 다시 순수 제주마로 경마를 실시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된다. 이는 또한 일반 승마용으로 인기가 많은 한라마 산업의 위축등 문제발생의 소지가 있어 논란이다.
■조랑말 체험공원
전시관은 쫄븐 갑마장길 나들이의 시작점이다.
전시관 내 전시물전시관 내 전시물이 곳에선 제주마와 관련된 여러 정보를 접할수 있다.
말을 이용한 농사관련 농기구부터 제주말에 관한 기록등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쯤 들러 볼만하다.
■행기머체
제주어로 '행기'는 놋그릇, '머체'는 돌무더기라고 한다. 놋그릇을 엎은 듯한 형상의 단일 바위체이다. '지하용암돔'이라 불리우는 크립토돔(cryptodome)은 지하의 마그마가 굳어져 외부에 노출된 것을 말하는데 세계적으로도 희귀하고 우리나라에선 제주에서만 발견된다고 한다.
그 뜨거웠던 세월은 가버리고 차갑게 식은 거대한 돌덩어리가 되어 말없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이 말을 키우기 시작한 시절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가늠할 수 없는 세월동안 여기에 자리했을 행기머체이다. 그 오랜 시간 속에서 제주의 바람과, 눈 비를 말없이 맞으며, 오가는 말테우리들의 벗이 되었을 것이다.
그 세월을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다.
■가시천길
가시천 숲길
주변의 광활한 초원지대를 한 줄 오아시스이듯 가로지르는 가시천을 따라 곶자왈이 펼쳐져 있는 숲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따라비 오름으로 향한다. 건천이지만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어 한여름 마소들의 갈증을 해결해 주고 말테우리들의 땀을 식혀주었다.
제주 곶자왈의 식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바닥엔 짚으로 짠 폭신한 카페트같은 바닥재가 깔려있어 걷기에 수월하다. 초가을 아직은 푸름을 간직하고 있는 잎새들에 걸러진 햇살은 이미 한여름의 것이 아니다.
가시천 숲길을 나오면 따라비오름 입구이다.
■따라비오름
오름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따라비 오름은 표고 342m,비고 107m로서 15분이면 오를 수 있다. 가을이면 정상부근에 억새군락이 장관을 자아낸다. 말굽형 굼부리(분화구)안에 세개의 작은 봉우리가 형성되어 있는 특이한 형상이다. 이는 1차 폭발 후 세월이 지나 다시 용암이 분출되어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비 오름 입구를 지나 조금 걸으면 울창한 편백나무 숲길이 나온다. 보통 제주에선 울창한 삼나무 숲이 종종있다. 여기선 피톤치드 가득한 편백나무 숲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삼나무는 제주에선 쑥대낭이라고 해서 저급 목재로 취급받는다. 편백은 일본말로 '히노끼'라고도 하는데 무늬가 미려하고 특유의 좋은 향기가 있어 고급 건축자재로 쓰인다. 천연 항균물질인 피톤치드 함유가 많아 고급 도마의 재료로도 쓰인다.
편백나무잎
삼나무 잎
행운이다. 천천히 걸으며 깊은 호흡으로 온몸에 건강을 담아낸다.
따라비 정상으로 이어진 계단은 폭이 넓어 걷기 수월하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오르다 보면 금새 정상에 다다른다.
오름의 여왕답게 한눈에 그 자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좀 더 걷는 수고를 하는 이에게 여왕은 수줍은 듯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상에 서서 보면 오름 자체의 아름다움과 주변의 풍광을 모두 담아낼 수 있으니 과연 오름의 여왕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청량한 가을 바람은 덤이다.
저 멀리 수많은 오름군을 품에 안은 한라산의 자태가 곱다. 제주의 360여개 오름은 분명 한라산의 아이들이다. 그 중 이쁜 딸 하나가 따라비오름이다. 따라비 오름의 명칭에 대해선 그 기원에 여러 해석이 있으나, 감히 필자는 '딸아이'에서 따라이, 따라비로 해석해 본다. 아무렴 어떤가.
오름정상에서 잣성방향 하산길
하산길에 되돌아본 오름 풍경
■ 헌마공신 김만일
제주출신의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김만덕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에 여성으로서 사업으로 대성하고 번돈을 백성들의 구휼에 희사했으니 그 은덕을 기려 마땅하다.
필자는 주저없이 헌마공신 김만일(1550~1632)을 제주출신의 대표 역사인물로 생각한다. 김만덕도 훌륭한 분이지만, 김만일은 그에 비해 역사의 평가나 후세의 인식이 너무 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분의 고향인 의귀리에 옷귀마테마타운을 만들고, 관련행사를 개최하고 있지만 아직은 홍보와 인식 부족인지 김만덕에 비해 아는 이가 많지 않은 듯 하다.
김만일은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인 김인찬 장군의 후손(8대손)이다. 김인찬의 아들 김검룡은 태종 때 제주의 행정을 총괄하는 도지관을 지내며 경주 김씨의 제주 입도조가 된다. 종달리에 묘가 있다.
김만일은 17세기 전후 격동의 조선사회에 크게 기여를 하지만, 역사적 평가는 박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선조부터 인조 까지 김만일의 공에 대한 숱한 기록이 있으나, 중앙의 인물이 아닌 변방의 인물이니 후대 역사가들은 별로 다루지 않은 것이다. 제주에서조차 외국인인 하멜은 알아도 김만일을 모르는 이가 더 많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위인의 실체적인 업적보다 스토리텔링과 홍보의 부족에 원인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제주도 차원에서 김만일 부흥운동(?)이라도 해야할 판이다.
김만일은 당시 왜소해져만 가는 제주마의 개량사업을 통해 제주의 국영목장에 속한 말들보다 우수한 말들을 길러내어 2만마리까지 보유했었다. 지금의 녹산로, 따라비오름을 포함한 가시리일대 2000만평에 이르는 산마장을 개척하고 운영했다.
다음 내용은 권무일의 역사소설 '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 중 김만일의 업적을 요약한 것이다. 저자가 스스로 발굴한 역사기록을 토대로 저술한 것이라 김만일의 업적에 대한 사실관계가 거의 일치한다고 본다.
○선조 19년(1586년)에 가리포(지금의 완도)에 왜적이 침입했을 때, 무과출신인 38세의 김만일은 100마리의 군마와 기마병을 이끌고 전라도 일대를 누비며 왜적을 소탕한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발발시 아들 대명을 대장으로하여 기병 200명과 기마 200마리를 보내 참전시키고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선조 27년(1594년) 봄 군마 100마리, 가을에 400마리를 헌납한다. 이때 선조는 중추부 동지사 및 가선대부(종2품)관직을 주고 공신록에 헌마공신으로 올린다. 이 때 9개월간 한양에서의 관직생활을 하나 고향에서 말을 키우기 위해 귀향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키우던 말들을 잡아 건육,힘줄,가죽등을 전시물자로 헌납하였다.
○임진왜란 종전 후 군마 2000마리를 바치라는 명의 요청에 결국 1000필을 헌납한다.
○선조 37년(1604년)에 제주에 극심한 가뭄과 태풍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곶간의 곡식을 모두 내어 백성을 구휼하였다.
○광해군(1608년 즉위)이 기병양성을 목적으로 김만일에게 군마 2000필을 요구하자 보냈는데, 광해군은 말 1필당 쌀20석또는 무명1동(1동은 50가구가 입을 옷감분량)으로 보상했다.
김만일은 이를 백성의 구휼에 사용했다.
○광해군10년(1617년)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 조선군 파견을 요청하여, 광해는 김만일에게 말 2000필을 요구, 김만일은 2200필을 진상함. 결국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함으로써 후에 정묘호란 때 이 말들이 다시 조선땅을 짓밟게 되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광해군11년(1618년) 김만일은 자의로 말 500필을 끌고 한양으로가 헌납한다. 광해는 보답으로 김만일에게 5위도총부 부총관(정2품)을 제수하나 얼마 안되 도성의 부정과 무능을 절감하고 다시 낙향한다.
○인조5년(1627년) 정묘호란 후 후금이 물러나면서 전쟁보상금으로 군마를 요구하여 240마리를 헌납한다.
○ 인조6년(1628년)인조는 김만일에게 말 500필을 징수하고 명예직인 종1품 숭정대부에 칭하나 김만일은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긴다.
김만일 사후 제주의 국마장이 붕괴되어 갔어도 김만일가의 산마장은 효율적으로 잘 유지되었다.
효종은 김만일 자손들에게 종 6품의 산마감독관을 하게하고 이를 세습하게 하였다. 김만일가 경주 김씨들은 고종때 세습을 폐할 때까지 240년간 83명이 산마감독관을 세습했고, 기근시 구휼활동을 꾸준히 했다. 영조때 산마감독관 김우천과 그 아들은 쌀 1500석을 내어 구휼하여 영조가 자신의 옷을 하사했다고 한다. 지금의 의귀리 지명이 이렇게 생겼다는 설이다.
김만일가는 2000만평이 넘는 산마목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녹산장, 상장, 침장으로 나누어 친족끼리 관리하였고, 선별된 양마를 관리하기 위해 별도로 따라비오름 근처에 '갑마장'을 두었다. 녹산장은 대록산(큰사슴이오름)에서 서쪽일대를 아우른다.
국난의 시기에 국가가 해내지 못한 일들을 김만일은 해내었다. 이름 없는 수 많은 민초들의 삶도 역사이지만, 그래도 이 분 정도면 당당히 위인의 반열에 이름을 내어야 마땅하다.
역사영화나 드라마라도 한번 제작해봄이 어떨까. 관계자분들의 관심을 기대해 본다.
■잣성길
목장에서 키우는 말들이 한라산 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쌓은 돌담을 잣 또는 잣담이라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잣성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잣담을 대신하게 되었다. 잣담은 방목하던 말들의 관리를 위해서 산쪽으로만 쌓은 것이 아니라 해안가 농지방향으로도 쌓았었다. 가축이 작물을 먹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곳에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잣담을 볼 수가 있고, 이 잣담을 따라 난 길을 잣성길이라 칭하고 있다.
이곳의 잣담은 말이 한라산 방향으로 못가게 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 목장의 경계담인 듯 하다. 항공사진으로 보면 예전 김만일 일가의 갑마장과 상장의 경계로 보인다. 이 잣담을 경계로 남서쪽은 가시리, 북동쪽은 성읍리이다. 누군가 이 담을 따라 편백과 삼나무를 심었고 지금에 이른 듯 하다.
따라비 오름을 내려와 풍력단지까지 잣담을 따라 난 길이 약 2km 정도 된다.
나무사이로 걷는 기분이 꽤 즐겁다. 군데군데 쓰러진 나무로 길이 막히면 옆에나 있는 남영목장의 승마로로 걸으면 된다. 다만 잡초가 다소 무성하여 걷기에는 좀 불편하다. 갑자기 뱀이 나오지 않을까 덜컥 겁이나 다시 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30분쯤걸었을까. 풍력발전 단지로 통한 길이 나온다.
■풍력발전단지
이곳 풍력단지엔 제주에너지공사의 풍력발전기 13기가 서 있다.
어느샌가 제주의 들판엔 풍력발전기의 군상이 하나의 풍경이 되어 버렸다. 문명의 이기가 주는 혜택은 누리면서, 생산시설에 대한 막연한 반대를 하는 일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다만 가급적 자연환경과 역사,인문학적인 관계와의 조화를 최대한 이끌어 내는 선에서, 세월의 변화를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싯점이기도 하다. 요즘 이슈가 되는 제2공항이나 쓰레기 매립장 문제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유채꽃프라자
가시리 주민들은 옛 녹산장일대에 유채꽃프라자를 운영한다. 카페와 연수시설로 운영한다고 한다. 나들이에 지친 발걸음을 이곳으로 돌려 잠시 쉬어간다.
큰사슴이오름(대록산)
유채꽃프라자 주변 풍경
■녹산로
녹산로는 앞서 말한것 처럼 말 목장인 녹산장에서 유래한 도로명이다. 부지런한 가시리 주민들은 해마다 봄이면 수킬로미터에 걸쳐 길을 따라 유채꽃을 피워낸다.
예전에 말들이 뛰놀던 녹산장 일대에 난 녹산로는 봄이면 노란 유채꽃과 만개한 벚꽃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벚꽃은 금방 지기 때문에 4월 초순 일주일정도 벚꽃과 유채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꽃길을 볼 수 있다.
말 모자상
산마장을 종횡무진하던 김만일의 말들은 이제 아쉽게나마 조각상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엔 따라비 오름의 억새에 취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