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역사나들이길

성읍 성읍리 코스

페이지 정보

#일관헌#정의현성#정의읍성#성읍민속마을#성읍리#영주산#제주역사#제주여행#근민헌


성읍리는 세종 5년 (1423)년에 정의현의 읍치(邑治)를 성산읍 고성에서 지금의 자리(예전의 진사리) 옮겨와 형성된 마을입니다. 복원된 대정현성과 제주특유의 초가로 이루어진 유명관광지이며 제주의 역사와 정취가 잘 묻어나 있는 곳입니다.


■정의현성(정의읍성) 

정의현성 남문 및 돌하르방

정의현성(정의읍성)은 태종 16년(1416년) 제주를 1목 2현(제주목, 정의현,대정현)을 둘 때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 축성한 읍성(옛 정의현성)을 7년만에 이곳으로 옮겨와 축성한 읍성이다. 그 후 1914년까지 약 500년간 정의현의 읍치(邑治)로서 그 기능을 하였다.

1984년 국가중요 민속자료 188호로 지정된 이후 성곽등의 보수 및 복원작업을 진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성안에는 성읍민속마을이 들어서 있으며 읍성의 규모는 동서 약350m, 남북300m, 둘레 약 1200m이다.(※읍치-조선시대 지방 고을의 중심 공간)

 

1914년 지적도에 색을 입혀 표시한 당시 성곽과 길

1914년 지적도에 의하면 당시 치성을 포함한 성곽의 형태가 뚜렷이 나타나며, 동서남문의 위치와 성굽길, 옹성의 형태도 잘 보이고 있다. 또한 성 주변으로 해자가 있었으며 해자를 따라 난 해자길(필자가 임의로 명명한 이름)이 성곽 바깥을 감싸고 있다. 이 해자길은 지금도 도로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예전 성의 구조가 이렇게 온전히 남아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로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제주읍과 마찬가지로 이 길이 어떤 의미였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성을 쌓고 성 외곽에 해자를 두었는데 제주에선 물을 채우는 대신 탱자나무와 같이 가시가 돋은 나무들로 둘러놓아 적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것이 축성의 기본 구조이다.

문헌으로 성안에 두곳의 빗물을 가두는 우물이 있었다는데 위의 지적도 상에 연못(池)으로 표기된 곳이 두군데 보인다. 정의객사터 앞에 있는 못은 현재도 남아 있지만 성읍교회 앞에 있던 못은 지금은 매립되어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일제는 성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신작로를 개설했고 이로 인해 정희현성내 북측에 위치했던 관청터가 관통되어 동서로 분리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영남대학교 김동섭의 석사논문에 수록된 1994년 성읍민속마을 정비계획,남제주군

1994년 남제주군(현 서귀포시)에서 작성한 성읍민속마을 정비계획에 보면 예전의 성안 옛길과 주요 시설, 가옥등이 표기 되어 있다. 옛길은 1914년 지적도와는 조금 상이한 점은 있지만 관청의 자리는 잘 표기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는 신작로를 내면서 의도적으로 관청자리를 관통시켰음을 짐작케 한다. 민족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일제의 치밀한 계획일 것이다. 아프지만 잊지 말아야할 우리의 역사이다.


□ 정의현성의 복원 
현재 복원된 정의현성(성읍민속마을) 위성사진-출처 네이버지도


현재의 정의현성 위성지도에 입힌 1914년 지적도의 성곽과 길

현재 복원된 정의현성에 옛 지적도상 성곽자리를 입혀보았다. 현재 북동측의 치성 (윗 그림의 빨간원) 2군데가 제대로 복원되어 있지 않았다. 아쉽게도 앞서 언급한 남제주군의 성읍민속마을 정비계획의 가로체계 도면에도 북동측의 치성은 표기 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이 정비계획에 의해 성의 복원작업이 이루어진 듯 한데, 아쉬운 부분이다. 지금이라도 가급적 원형에 맞게 치성의 복원을 제안해본다.

 

탐라순력도 정의강사에 표현된 동서남문

탐라순력도의 정의강사, 정의조점, 정의양노를 보면 남문에는 옹성이 그려져 있지 않다. 동서문에만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1914년 지적도에도 동서문에만 옹성의 흔적이 보일 뿐 남문에는 지적상 옹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필자기 판단하기엔 예전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남문에 옹성이 없었다는게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의 웅장한 옹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화재 복원의 기준이 무엇인지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필자의 눈에는 남문의 옹성이 거추장스런 악세사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주 언급하는 말이지만 가급적 더함도 덜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복원이 맞다고 본다. 정작 성곽 상단의 여장은 제대로 복원하지 않으면서 이럴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과하면 부족함보다 못한다고 했다. 괜한 시비거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니 오해 않기를 바란다.

 

현재 복원(?)된 남문의 옹성


탐라순력도의 정의조점 : 남문에는 옹성이 없다- 출처, 문화컨텐츠닷컴 

정의양노: 남문에는 옹성이 없다- 출처, 문화컨텐츠닷컴

정의조점과 정의양노 정의강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또 한가지 사실을 볼 수 있다. 동문과 서문의 지붕을 보면 여느 민가와 마찬가지로 노란색을 입혀놓았고, 남문에는 짙은 회색으로 현청 건물들과 같이 기와를 표현하였다. 즉 동문과 서문의 지붕은 초가지붕이고 남문은 기와 지붕이라는 의미이다.

 

기와지붕의 동문과 서문

동문 서문 모두 기와지붕의 멋들어진 누각이 서 있다. 예전의 초가지붕을 대신해서.

■남문

남문 입구

정의현성 탐방은 남문에서 시작한다.

 

외국인 관광객과 외국인 가이드

제주도내 유명관광지라 평일에도 꽤많은 방문객들이 보인다. 그 중 한무리 외국인들이 눈에 띈다. 가이드가 영어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가이드도 동남아계 외국인이다. 제주관광 가이드를 외국인이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웬지모를 아쉬움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냥 그렇다는거다.

 

남문 앞의 성읍민속마을 안내판

안내판에는 성의 규모를 동서 160m, 남북 140m로 표기해 놓았다. 규모가 이상해서 지도에서 거리를 확인해보니 동서 약 350m, 남북 약 300m가 나온다. 안내판이 잘못 되어있다. 근민헌 앞의 안내판도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아무도 몰랐나보다. 수정이 필요하다.

 

\
성안에서 본 남문의 누각 

남문 밖에 서 있는 4기의 돌하르방 

제주읍성,대정읍성과 마찬가지로 성문 밖 입구에 돌하르방을 세워 놓았다. 다만 돌하르방의 형태와 크기, 숫자가 성마다 다르다. 정의현성에는 문마다 4기의 돌하르방이 서 있다.


남문에서 바라본 정의객사로 이어진 길(남문길)

■원님물


원님물

원님물은 남문에 들어서서 10여미터만 가면 길 우측에 있다. 남문통 관청물이라고도 불렀다.

'원님물은 식수로 사용하던 물통이다. 생수량이 풍부하지는 않았으나 천천히 솟았다. 성읍 인근에서는 가장 깨끗한 물이었다. 양이 적었으므로 서민의 사용을 금하고 관아에서만 사용하였으므로 원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비가 쏟아지면 흙탕물이 가득찼다가 2~3일 후에 다 빠져나간다. 남문 쪽에 있어서 남문물이라고도 하고, 관갯물(관가물), 원님물통이라고도 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상은 초가가 바로 앞에 있다.' 출처-고영철의 역사교실

아무런 설명도 표식도 없으니 보는이들은 무심코 지나가기 일쑤이다. 안내표지판 설치가 필요해 보인다.

■고상은 가옥


대장간집으로도 불리던 곳이다. ㄱ자 형태의 가옥구조이며 과거 대장간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문화적 가치가 크다. 아직도 주민이 거주하며 내부가 현대식으로 개량되었다.

■ 고평오 고택




이문간이 뚜렷하다. 밖거리는 예전에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325평의 넓은 대지에 안거리, 밖거리, 이문간이 있고 70년도에 모커리를 헐어버렸다고 한다.

■노도리 방죽


지목이 지(池)로 표기된 1914년 지적도



노도리 방죽

용천수라기 보다 빗물을 모아 식수 또는 생활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인공 못이다.

방죽(물을 막기위해 쌓은 둑)의 규모가 꽤 큰것으로 보아 성안 사람들이 요긴하게 썼던 저수지 기능을 했으리라 본다. 지금은 연꽃이 만개하려 한다.

왠일인지 원님물과 더불어 노도리 방죽을 설명하는 아무런 안내판이 없다. 단지 금연구역, 출입금지 안내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객주집 이문간과 내부 안거리 밖거리

정의 객사 바로 앞에 위치하고 원래 객주집이었다. 넓은 대지에 안거리, 밖거리, 목커리, 창고, 이문간등 다섯채의 건물이 있으며 제주의 전통적인 가옥배치에 객주집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예전의 돗통시 내외부

■ 정의현 객사(客舍)

정의현 객사 -2001년에 복원

객사는 지방 군현(郡縣)에 마련된 국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정당(正堂)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숙박하는 건물을 합친 시설을 말한다.

제주대학교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정의현 객사는 16세기 중반부터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궐패를 모셔놓고, 관아를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들이 머물던 곳으로서 관아에 관련된 시설들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시설에 해당된다. 여기에 모셔놓은 궐패란 한양에 있는 왕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수령이 왕의 지시에 따라 고을을 다스리는 의미에서 비치해 두었으며 수령을 비롯한 관원들이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대궐을 바라보며 절하는 향망궐배(向望闕拜)가 이루어지던 곳이다. 또한 객사는 중앙으로부터 임금의 뜻을 받들고 내려온 사신들을 머물게 하며 접대하던 건물이기도 하였으며, 관찰사가 순시차 들르면 잔치를 벌이거나, 백성들에게 향시를 베풀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객사는 각 지방에서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세워지거나 관아와 나란히 지어지곤 하였다. 관사(館舍)·객관(客館)이라고도 하였다.' 출처-나무위키


정의강사에 표현된 정의현 객사의 모습

탐라순력도의 정의강사나 정의양노에 정의현 객사는 팔작지붕의 단일 건물로 묘사되어 있다. 현재는 맞배지붕인 중앙의 정청(정당)과 좌우의 익헌(익실,익랑)이 합쳐진 육지부의 전통적인 객사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이 또한 과한 복원의 실예로 보인다.


정의향교에 모셔진 전패- 출처 고영철의 역사교실

1909년에 객사가 공립정의보통학교 교사로 활용되면서 일제는 왕의 전패를 폐기하려고 하였다. 당시 유생들은 민족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전패를 숨기고 일제의 고문에도 끝까지 전패의 위치를 밝히지 않아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이 전패는 광복 후에 정의향교에 모셔졌다.



정의현 객사에서 정의향교 가는 마을 길

■고창환 고택(이영숙 초가)


고창환 고택 (이영숙 초가)

19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집은 정의향교와 담을 마주하고 있고, 20세기 초에 여관으로 쓰여져 동네에서 여관집으로도 불리었다. 그래서인지 주택입구에 정낭이 없다. 제주의 일반적인 전통 초가의 형태로서 특이한 점은 없다. 다만 예전 자료에 이영숙 초가로 소개되어 있는 집이 현재는 고창환 고택으로 불리고 있어 그 연유가 궁금하다.


고창환 고택 안내문과 바로 옆의 이영숙 가옥 비석

원래 이영숙이라는 분이 사시다가 고창환이라는 분께 매매를 해서 이렇게 된건 아닌지 추측만 할 뿐이다.


절정에 오른 어느 초가의 수국

■정의 향교


정의향교로 난 올레

정의향교는 안내문에 따르면 1408년에 홍로현(현재 서귀포시 서흥동)에 처음 세워졌다가 1420년 고성리로 옮겨졌다. 1423년 정의현이 이 곳 성읍리(진사리)로 옮겨 오면서 서문 밖에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849년에 지금의 장소에 다시 옮겨 세워졌고 1967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성전 내삼문


정의향교 대성전

대성전의 현판은 제주향교, 대정향교와 더불어 한석봉의 글씨체다. 전에 소개했던바와 같이 전국의 대부분의 대성전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체로 되어 있다.

'대성전에는 모두 5성(五聖) 22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데 공자를 주향으로 좌우에는 4성위(四聖位)[안자·증자·자사·맹자]가, 동·서벽에는 송조4현[宋朝四賢, 주돈이·정호·정이·주희]과 동국(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주돈이와 정이 양위(兩位)는 1982년에 봉안한 것이며, 대정향교와 마찬가지로 소설위(小設位)이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제를 봉행하고 있는데 주로 표선·성산·남원의 유림들이 참여하고 있다.' 출처-고영철의 역사교실


명륜당(우)와 수선당(좌)

명륜당은 향교내의 교육시설로서 유학을 강연하고 인재 교육을 담당하는 일종의 공립교육기관이다. 반면에 서원은 일종의 사립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향교의 교육기능은 198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그 기능이 상실되었고,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급격히 쇠락하게 된다.

정의향교의 명륜당은 영조14년(1738) 재실과 함께 창건되었고, 순조 9년에 화원동으로 옮겨졌다가 1849년에 향교가 이곳에 자리하면서 같이 옮겨졌다.

'《제주의 문화재》에는 정의향교가 태종8년(1408) 홍로현에 건립되었던 것을 1416년 정의현청 소재지였던 성산읍 고성리에 옮겨 세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 지금도 서귀포시 서홍동 마을 중심 지역 남쪽에 ‘향교가름’이라는 지명이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출처- 고영철의 역사교실


■ 서문

성안에서 바라본 서문


서문과 돌하르방



서문 밖 성곽과 해자터

서문 밖에서 바라본 해자터엔 잔디와 잡초가 무성하다. 해자가 있던 자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성의 원형을 그나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다행이다. 제주읍의 해자는 해자길만 간간히 남아 있을 뿐 건물로 가득차 버렸다.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성안 가옥

정의현성내 성읍민속마을에는 실지로 주민이 거주하는 가옥들이 많다. 전통가옥 구조와 관광객들의 방문에 의한 소음 등 여러 불편함이 많음에도 아직도 여기서 삶을 이어가시는 주민분들께 감사를 느낀다. 정원을 가꾸고 주거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빈집은 급격히 낡고 폐허가 되어간다. 반면에 제주목관아와 같이 관리는 잘 되고 있으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생기가 없다. 박제에 불과하다.

성읍민속마을에 주민들이 살고 있어서 옛 마을의 정취와 더불어 살아있는 민속마을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민가의 길게 이어진 올레


남문에서 동문으로 이어진 성곽


일제가 신설한 신작로

■근민헌

근민헌은 정의현감이 사무를 보던 청사이다.


근민헌

원래 근민헌이 있던 자리에는 일관헌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근민헌이 있던 자리에 일관헌이 들어섰었고, 일관헌을 철거하고 다시 2014년에 근민헌으로 복원이 된것이다.


예전의 일관헌(1975-2012)-출처 고영철의 역사교실

일관헌(日觀軒)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형과 다르게 개조되어 면사무소로 이용되다가 리사무소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에 골함석 지붕으로 개조되어 사용해 오던 건물을 토대로 1975년에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남동향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윗 사진)

2012년에 일관헌을 철거하고 근처 관아지의 유적 발굴과 고증을 거쳐 2014년에 동향의 건물인 지금의 근민헌을 복원하였다. 탐라순력도에도 아(衙)로 표기된 건물이 동향으로 위치한다. 추후 관아터 일대의 옛 관아 건물들을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옛 관아터 일대에 들어선 민가



관아터 일대의 팽나무와 느티나무 군락



성 북쪽 출입로와 성 외곽의 해자터

■동문


복원된 동문

동문은 성의 세개의 문 중 가장 늦게 복원되었다. 바닥에 남아있던 주춧돌을 토대로 복원했다.

성문은 잠겨져있고 누각은 찾는이 없이 한가롭다.



동문 밖에 마주한 4기의 돌하르방



예전의 정의현성 돌하르방 출처 제주100년,제주도

예전의 사진을 보면 성굽길 어귀에 돌하르방이 2기씩 마주보고 서 있다.


성의 동측 출입로

남문과 서문과는 달리 성문을 통해 출입하지 않고 복원전 성곽을 헐고 낸 길로 출입한다.


느티나무와 어우러진 동문의 누각


■한봉일 고택

한봉일 고택의 이문간

19세기초에 지어진 한봉일 고택은 동문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곽을 끼고 있다.


한봉일 고택의 이문간과 안거리 밖거리

한봉일 고택은 개조를 거의 하지 않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제주 남쪽지역의 가옥구조와 배치를 잘 보여준다고 한다. 잘 관리되어 단정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아서인지 생기를 느낄 수는 없다. 역시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삶을 담는 그릇이 집이 가진 본연의 역할이니까. 안타깝지만 현실이니 그러려니 한다. 앞서 말했듯 그나마 사람이 살고 있는 고택들이 성안에 곳곳에 있기에 고마울 따름이다.


팽나무와 이문간, 동문

이문간에는 쉐막(외양간)과 헛간이 있다.


동문에서 일관헌으로 이어지는 길- 예전엔 제주의 길이 모두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성읍교회


성읍교회 전경

이기풍목사는 제주 최초의 기독교 목사이다. 1908년에 입도하여 1910년에 제주읍내에 출신청을 매입하고 성내교회를 세웠다. 그 이후에 세운 교회가 바로 성읍교회이다. 조천나들이 코스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기풍 목사가 조천교회를 설립할 때 '천아나'라는 분이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조천교회를 건립한다.

천아나라는 분은 성읍으로 이사와서 다시 본인의 집터를 교회로 제공하는데 지금의 성읍교회의 기틀이 되었다. 다른 기록을 보면 1908년에 성내교회가 설립된 이후 1909년에 성읍교회가 설립되었다고도 한다. 필자가 확인한 바는 성내교회는 1910년에 설립된것이 맞다. 성읍교회는 성내교회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성읍교회의 종탑

종탑은 교회 설립 때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제주 현무암으로 사각뿔 형태의 기단을 쌓고 그위에 정사각형의 상단을 쌓았다. 기단과 상단의 높이는 각각 3m정도이다. 철골구조의 탑을 설치한 후 철탑 하단에는 종을, 상단에는 십자가를 설치했다.

종탑은 성읍 민속마을이 전체적으로 가진 분위기로 볼 때 분명이 이질적인 경관요소이지만, 주변과 그리 생뚱맞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레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기단이 동네 마다 흔히 보이는 방사탑과 같은 믿음을 주기 때문일 수 도 있겠다.


성읍교회 앞 연못 터

지금은 메워져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분명 어느 날까지는 성안사람들이 소중히 사용하던 못이 있었다. 1914년 지적도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

못이 있던 자리는 황량한 공터가 되어버렸다.

■영주산




둠부리통

정의현성 북쪽 출입구를 나와 영주산으로 가다가 하나로 마트 뒷길에서 우연히 만난 물통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둠부리통이라는 다소 퉁명스런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세개의 물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과거에 성 북쪽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걷는 즐거움을 이런 우연에서 다시 느껴본다.


연자방아석

역시 하나로마트 주차장 뒷켠에서 우연히 본 연자방아 돌이다. 옛것인지 새로 깎은건지 알 수가 없다. 왜 이곳 한구석에 버려진듯 놓여 있는지. 견물생심을 뒤로하고 부지런히 영주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천미천

천미천은 영주산 앞과 정의현성 사이를 휘돌아 감듯 내달리는 하천이다. 그러나 하천이라 하기엔 물이 없다. 최근 상류에 성읍 저수지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가둔 탓일게다. 폭이 족히 30미터가 넘어보인다. 지금은 바닥을 편평하게 깎아 놓았다. 예전엔 어떤모습이었을지 상상을 해본다.


영주산

영주산은 해발 326.4m 비고 176m의 말굽형 화산체 오름이다. 정의현성의 북쪽에 위치한 주산이다.

제주에는 5대 명산이 있다. 한라산,산방산,성산(일출봉),두럭산 그리고 영주산이다. 두럭산은 김녕리 코스에서 언급한 바있는 데 수중에 있는 일종의 여(암초)이지만 당당히 제주 5대 명산의 반열에 올라있다.

영주산의 속명은 영모루이다.



영주산 안내판과 등반로 입구



영주산을 오르는 길

영주산 초행길은 시작부터 난항이다. 출입구를 지나 오른 쪽으로 나 있는 계단길이 있다. 힘들게 올라가니 계단이 끝나는지점에 이정표가 없다.

결국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보일듯 말듯 한 오솔길을 따라 정상을 향하니 둘러온 셈이 됐다. 굳이 계단 길로 가지 말고 처음부터 입구에서 좌측로 가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로 가는 것을 추천한다. 이정표의 설치 및 관리체계가 아쉽다.



영주산 등성이 초원의 오솔길

나무가 없는 등성이의 오솔길을 거침없이 오른다.경험상 저 하늘과 맞닿아있는 곳이 정상이 아닐거라는 예측을 해본다. 역시다.


오솔길 끝에 만나는 속칭 천국의 계단

말로만 들었던 영주산의 천국의 계단(?)이다. 보이는 저 계단의 끝은 정상일까. 역시 아니다.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괜히 천국의 계단이 아니다. 숨이 가빠온다. 말그대로 오르다 힘들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조크 섞인 이름이었다. 물론 착한자만이 가는 길이겠지만.


계단 좌우로 핀 산수국.끝물이라 거의 시들었다.


중턱에서 동쪽으로 난 풍경

숨을 잠시 고르고 둘러보니 일출봉을 비롯 제주 동부의 오름과 풍광이 펼쳐진다. 시원하다.


계단 등반로의 끝

계단을 오르다 끝에 파란 리본들이 매달린 난간대가 보이면 다 올라 온 셈이다.



영주산 정상에서의 360도 뷰

역시 다른 산행이 그러하듯 올라온 보람이 있다. 빠른걸음 20분, 천천히 올라도 30분이면 족히 오를 수 있다.

정상에선 한라산과 제주 동남부의 오름군이 훤히 보인다. 다행히 날씨가 도와줘야겠지만. 오늘은 행운이다.



영주산 정상부근에서 보이는 한라산


성읍저수지

성읍저수지는 천미천 상류지역에 2003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2016년에 완공을 본 다목적 저수지이다. 이곳에 물을 가두니 당연히 지금의 천미천은 건천이 되었다. 비가오면 물이 잘 빠지는 제주 대부분의 토양과 달리 성읍 일대는 물이 잘 안빠져 큰 비가 오면 물난리를 겪기 일쑤였다고 한다.

성읍저수지는 28만여m2에 담수량 125만톤, 평균수심 8m에 이른다. 어승생저수지의 13배규모이다. 성읍리,표선리,하천리 125ha에 용수를 공급한다고 한다.


하산길

등반로에 로프가 매어져 있을 정도로 내려가는 길은 다소 급경사 길이다. 무릎이 안좋다면 왔던길로 되돌아 하산하길 권한다.


하산길에 만나는 울창한 숲

그래도 하산길은 울창한 숲길이다. 보람이 있다. 피톤치드와 함께 새소리가 청량감을 더해 고단함을 잊게한다.


하산길 이정표

숲길이 끝나면 곧 처음의 입구와 만난다. 산행의 끝이다.


영주산 입구에서 북동쪽으로 난 길

영주산에서 읍성으로 되돌아 가는 길은 왔던길이 아닌 반대방향의 길을 추천한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울창한 삼나무 숲길이 반긴다. 등반때 흘린 남은 땀을 완전히 식혀준다. 새소리 또한 즐겁다.


수국이 만개한 민가


천미천의 둑

천미천가 밭에서 높이가 3미터정도 되는 둑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규모로 보았을때 물난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케한다. 성읍저수지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동문 입구

어느덧 동문이다.

마을길을 다시 걸어 출발지인 남문 주차장으로 향한다.



남문으로 향하는 마을안길 풍경


남문


남문앞 주차장 주변의 점포건물

처음 출발할 때 무심히 지나쳤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성읍마을에서 내내 눈에 익던 그 초가들이 아니다. 전통초가의 비례와 비교하면 생뚱맞다. 건물의 높이도 구조도 눈에 거슬린다. 정의현성 내에서 경험한 전통초가가 주는 편안함이 없다.

상업적 용도로 지어진 이 건물들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전통 초가의 멋과 맛이 어떤것인지 비교해보자는 뜻에서 언급해본 것이니 괜한 오해는 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정의현성과 성읍민속마을은 비록 상당 부분 관광지화 되었지만 옛길을 비롯해서 많은 면에서 우리 제주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정취를 느끼고 맛볼 수 있는 공간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랑스럽다.

모처럼 맑은 하늘과 공기와 풍광이 내어준 행복한 답사길이었다.


 

입회비 및 후원계좌 : 제주은행 6901008085
(예금주:사단법인 제주문화역사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