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역사나들이길

온평 온평리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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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지#온평리#제주여행#제주알기 
온평리는 고·양·부 삼신인(三神人)의 혼례 전설을 간직한 혼인지가 있는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마을 전체가 여유롭고 제주의 정서를 잘 간직하고 있어 마을안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곳입니다.


■혼인지

삼성혈에서 태어난 고,양,부 삼신인이 사냥을 하다 쾌성개 혹은 화성개(화상개)로 불리는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바다에 떠 내려온 목함을 발견한다. 목함을 열어보니 벽랑국의 세 공주와 곡식의 씨앗, 가축등이 나왔다. 삼신인은 이곳 혼인지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세 공주와 혼인식을 올렸다.


혼인지 입구

혼인지 전경 - 출처 제주의 푸른밤님 블로그


혼인지는 약 500평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고 여름에는 연꽃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준설공사중인 혼인지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아쉽게도 혼인지의 물을 다 빼내고 준설 공사중이었다. 그러나 혼인지의 밑바닥을 볼 수 있었던건 행운(?)인지도 모른다.

혼인지의 깊이가 채 1미터가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혼인지 신화에 등장하는 벽랑국은 과연 어디일까.

시인 채바다가 2006년도에 전통배인 떼배를 타고 고대 탐라인의 항해로를 따라 전남 강진까지 탐사를 한적이 있다. 그때 고대의 항로를 탐사하면서 완도군의 벽랑도(지금의 소랑도)가 신화속의 벽랑국이 아닐까 추측한다. 한때 벽랑국이 일본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전남의 소랑도가 벽랑국이라고 하기엔 역시 근거가 충분치 않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신화는 탐라와 한반도 본토와의 교류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방굴


삼신인이 혼례를 마치고 기거했다는 신방굴이다.


신방굴

안으로 들어가면 방처럼 세갈래로 나뉘어져 있는 공간이 나온다. 세개의 방에 각자 신혼방을 꾸렸다는건데 벽랑국 세공주는 성격이 무난했던가보다. 이 좁고 불편한 공간에 프라이버시도 안되는 곳에서 신혼을 견뎠으니 말이다. 나중에 좀더 넓은 집에 살게 해주겠다는 삼신인의 감언이설이 있었던걸까? 신화는 신화일 뿐인데 괜한 상상을 해본다.


전통혼례관과 잔디광장

전통혼례관은 전통혼례 및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선 간간히 전통 결혼식이 이뤄진다. 물론 현대식으로 해석한 육지식 개량한옥이다.

■온평리(溫平里)

따뜻하고 태평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의 마을이다. 5월초에 방문한 온평리는 이름 그대로이다. 이 마을은 동산이나 오름이 거의 없는 평편한 대지에 위치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이해충돌이 심한 제주 제2공항 활주로 대부분이 온평리에 계획되어 있다.


혼인지에서 온평마을로 향하는 길





온평리 중동의 마을길 풍경


■온평리 애향탑과 충혼비

온평리 애향탑

이 탑은 온평리분들이 1981년도에 마을길 포장을 기념하여 세웠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말 그대로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이제까지 나들이 중 애향탑을 본건 온평리가 처음이다. 이런 자부심 가득한 마을에 공항건립으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온평리 충혼비

온평리 충혼비는 애향탑 바로 옆에 세워져 있다. 6.25전쟁동안 전사하신 이 마을 출신 군인 21분과 경찰 세 분의 넋을 기리고 위안코자 마을 주민들이 1963년도에 세웠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육지부만의 일이 아니었다. 4.3의 아픔을 겪자마자 육지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내던져진 우리 제주 청년들은 그렇게 모진 세월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것이다.


백년해로나무

충혼비 바로 옆엔 백년해로나무라고 이름지어진 팽나무와 후박나무가 하나가 된 연리목이 서있다. 사진으로 볼 때 나무의 잎이 다름을 확연히 볼 수 있다.

여기서 기도하면 득남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기도하는 이 볼 수가 없으니 요즘은 딸이 대세인게 맞나보다.





온평리 서동 마을길


동백나무와 대나무

서동 마을길가 어느 돌담에 오래된 동백나무 하나가 보인다. 여느 동백나무와 다르다. 속이빈 밑둥치 속에선 대나무가 자라고, 두갈래로 뻗은 굵은 가지는 돌담석을 꽈악 품고있다. 돌담석은 동백가지의 속살을 파고 들었다. 동백은 그렇게 대나무와 돌담석을 품고도 무성하고 짙은 이파리를 간직하고 있다. 해마다 짙 붉은 꽃망울도 피워내고 있을 것이다.

통시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때만 해도 제주시가지 내에 화장실(통시)에 돼지를 키우던 곳이 꽤 있었다. 관덕정 바로 앞에 있던 우리집에도 70년대 초반 초가집이었을 때 돼지가 있었다. 그나마 재래식 화장실 밑에 돼지가 살고 있는 형태인데 여기에 그런 통시가 있다. 원래 시골의 옛 통시는 가림벽도 지붕도 없이 돼지 울 한켠에 댓돌 두개를 걸쳐 볼 일을 보았다. 물론 돼지를 쫓는 작대기 하나는 필수였다. 벽과 지붕이 있는 통시가 있는 이 집은 그래도 동네에서 꽤 잘 나가던 집안이었을 것이다.


온평리 하동의 마을 길 전경


온평리 하동의 마을 길 전경

온평리 마을은 여느 동네와 달리 마을 길이 넓다. 또한 들어선 집들도 대체로 넓은 대지를 가지고 있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예전부터 온평리가 아주 잘 사는 마을이었다는 뜻일거다. 평지가 많은 곳이라 애초에 집터를 잡을 때 널찍하게 잡았는지도 모른다. 마을정경이 시원시원한게 여느 제주 마을과 확연히 다름은 필자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온평리 포구

부지런히 어선이 드나들었을 포구엔 레져용 배 몇척만이 매여져 있다. 흔한 갈매기 하나 안보이니 먹을게 나올 구석이 없나 보다. 바다는 짙푸르고 하늘은 파랗다.


온평리 포구의 거북바위-출처 제주투데이

벽랑국 세 공주를 모시고 온 거북이가 온평리가 좋아서 머물고 있다는 전설이 있는 거북바위이다.


온평리 포구근처 하동의 전경

■온평리 도대


도대 조형과 안내판

유감이다. 원래 있던 도대는 도로개설로 사라지고 새로 조성한 첨성대 모양의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의 설명으로는 사다리꼴 모양의 도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엉뚱하게 짝퉁 첨성대가 서 있다. 또 도대의 '도'는 입구를 뜻하는 제주어라고 한다. 도대 또는 도다이는 등대(燈臺)를 일본어로 도다이(とうだい, 灯台·燈台)라 한것이 도대, 도댓불이 된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 안내판이 틀린건지 내가 틀린건지 헷갈린다. 안내판이 너무나 자신있게 설명하고 있어서이다.

■신비스러운 물 쉼터 공원


신비스러운 물 쉼터 전경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던 용천수인 솔베기물을 신비스러운 물이라하여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 꽤나 신경을 써서 아기자기하게 공원을 꾸며놓아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좋은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잠시 앉아서 바닷바람 내음속에 온평마을에 내리는 햇살을 쬐어 본다.

■온평리 환해장성


환해장성

온평리는 제주의 해안마을 중 가장 긴 6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해안을 방어할 환해장성도 아직까지 긴 구간으로 남아 있다. 복원된 화북의 환해장성보다 더욱 성곽의 형태가 견고해 실질적인 방어기능을 할 수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온평리 동동 환해장성 바깥쪽 해안가를 황노알(황루알)이라고 하는데 벽랑국 세공주가 뭍에 오른 곳이라 한다. 썰물때 그때 새겨진 발자국과 마차바퀴 흔적을 볼 수 있다는데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연혼포 표지석-출처 세계자연유산제주

황노알은 연혼포라고도 하는데 바닷가에 연혼포라고 씌여진 표석이 있다.

황노알에서 200미터쯤 북쪽에 있는 해안가를 화성개 또는 쾌성개라고 하는데 벽랑국 세공주가 타고온 목함을 발견한 곳이라 한다. 파호이호이 용암지대가 잘 발달된 조간대이다.


온평리 동동의 마을 풍경

내통(우물)

비가오면 내창(시냇물)에 물이 차듯 우물에 물이 찬다고 하여 내통이라 불리던 우물이다. 일제 때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물도 말라 있고 관리도 안되는 듯 하다. 시대가 변해 아쉬운게 없어서이겠지만 그래도 우리 생활에 중요했던 곳이니 만큼 관리를 위한 작은 손길이라도 닿았으면하는 바램이다.


온평리의 어느 가옥

앞서 말했 듯 온평리의 집터는 대부분 넓게 자리하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엔 으례 정원을 잘 가꾸어 놓았다.


굴묵

예전 제주도 전통방식의 난방시설이었던 굴묵이 남아 있는 가옥이다. 당연히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제주 전통가옥은 육지부와 달리 난방과 취사가 분리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굴묵은 별도의 굴뚝이 없어 난방을 할때마다 매캐한 연기가 여간 곤혹스러운게 아니다. 필자가 초가집 살던 어린시절 굴묵에 불 때며 콜록거리시던 어머니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온평리 상동의 마을 풍경

온평리 마을은 정갈히 잘 정돈되어 있고 석양빛은 늘 그렇듯 포근히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널찍한 마을 안길을 걷다보니 어느덧 출발지인 혼인지 표석이 보인다.

그렇게 5월 초입의 온평리 여정이 마무리 되간다.

중순이면 감귤꽃향이 은은히 어우러진 온평리 마을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입회비 및 후원계좌 : 제주은행 6901008085
(예금주:사단법인 제주문화역사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