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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수산 고성/수산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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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수산코스는 성산읍 노인복지회관에서 출발하여 고성 성안길과 성곽을 거쳐 옛 길을 따라 수산진성을 둘러보는 길로서 제주 옛 길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약 9km)

■고성리(古城里)(성산읍)

고성리(古城里)는 이름 그대로 옛 성이 있었다는데서 유래한다. 애월읍에 있는 고성리도 마찬가지인데 항파두리성이 위치하고 있어서이다. 마을 노인분들은 묵은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주시내의 무근성과 같은 이치이다.

고성리는 성산읍사무소가 위치한 제주동부의 중심지이다. 그만큼 관공서와 관광관련시설, 교육,산업시설등이 밀집되어있다. 법정리인 신양리도 행정리인 고성리에 속해있다.

■고성(옛 정의현성)

고성은 옛 정의현성 즉 고정의현성(古旌義縣城)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초1416년(태종 16년)에 제주에 1목,2현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을 둘 때 정의현청을 두면서 축조한 성이다. 고려말 때 삼별초가 방어를 위해 쌓은 성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본거지인 항파두리성도 토성인데 굳이 이 먼 곳에 석성을 쌓을 이유도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축조된지 7년만에 (1423년,세종5년) 지금의 성읍(당시 진사리)에 정의현성을 옮기면서 폐성이 된 서글픈 사연을 갖고있다.

이유는 관청의 지리적 접근성 때문이라고 한다.

탐라순력도에는 구수산 고성(舊首山 古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표기의 오류라는 주장이 맞다고 본다. 예전의 수산진성이 아니고 정의현성 자리이기 때문이다.

고성(옛 정의현성)은 잊혀진 성이 아니었다!

필자도 제주사람이긴 하지만 고성리는 막연히 옛날에 성이 있어서 이름지어졌겠거니 생각했다. 제주원도심의 무근성처럼 구전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성은 존재했다.

사람들의 무관심속에 훼손되고 폄훼되는 속에서 600년의 세월을 버티고 있었다.


1914년 고성리 지적원도

답사준비 중 혹시나 옛 정의현성(이하 고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1914년 고성리 일대 지적원도를 살펴보다 지적도상 필지의 경계가 원형으로 되어있는 곳을 찾게 되었다.(윗 그림-보기쉽게 파란선으로 덧칠함)


필자가 1914년 지적원도에 표기한 옛길과 성곽, 문

지적원도의 원형으로 이어진 경계를 이어보니 성곽자리가 맞는 듯 하였고 옛 길을 표기하니 성문으로 추측되는 위치가 나왔다.



현재의 지적편집도에 옛길과 성곽을 오버랩한 그림

이를 토대로 자료를 찾다보니 선행연구와 제주도에서 발주한 관련 용역보고서가 있었다.

(선행연구는 2004년 문화예술재단에서 수행한 '비지정문화재 조사보고서' 이고, 용역보고서는 2017년 '고 정의현성 복원 및 활용 방안 수립연구 용역'이다.) 이미 제주도와 관련단체에서 고성에 대한 실태조사와 활용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1967년 고정의현 일대 항공사진-출처 고 정의현성 복원 및 활용 방안 수립연구 용역(2017)

60년대만해도 고성 안팍으로 나무가 거의 없어 잔존 성곽과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이제 길을 떠나보자.

■묵은장터거리


묵은 장터거리

예전에 장이 섰던 곳이다. 원지적도에 기록된대로 지금도 꽤 넓고 긴 광장이다. 제주에선 경작지 말고 저자거리에 이 만큼 큰 광장이 있던 곳은 관덕정 앞 밖에 없다. 필자가 다녀본 바로는 관덕정, 이아, 향교정문 앞 등지에서 이런 사다리꼴 형태의 광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광장들이 이런 사다리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을듯 하다.

이곳은 묵은 장터거리이지만 자료를 찾아보니 주변에 향사가 있었다고 한다. 광장이 사다리꼴 형태를 띄고 있어 의아했는데 여기도 역시 향사라는 공공시설이 있었던거다.

지금은 향사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성산읍 노인복지회관이 있어 혹시나 그 자리가 향사터가 아닐까 조심히 추측해 본다.

이 장터거리에선 제주 동쪽 지역의 온갖 산물이 거래됐을거다. 적어도 일제 때 일주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일주도로가 생기면서 그 주변으로 시장이 옮겨 갔고, 지역의 생활 중심지가 되면서 성안동네와 그 주변은 마치 구도심처럼 한적해졌음을 짐작케한다.

■서문



서문(추정)으로 가는 길


서문(추정)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고 정의현성 복원 및 활용 방안 수립연구 용역'(이하 용역보고서)에 의하면 위의 사진에 표기된 곳이다.



서문(추정)근처 잔존 성곽

서문(추정)으로 향하는 길 끝에 담쟁이와 온갖 덩굴로 뒤덮인 돌담이 보인다. 과수원의 경계이기도 하지만 그 과수원조차 버려져 있고 잡초가 무성해 성곽의 모습은 잡목더미 속에 묻혀 있어 온전히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다만 필자가 1914년 원지적도 및 현재의 상황을 볼때 서문(추정) 밖으로 이어진 길이 없다. 심지어 1914년 지적도에는 서문(추정)으로 향한 길조차 중간에 끊겨있다. 따라서 원래 서문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성문이 있었다면 당연히 드나드는 길이 있었을테고 그 길은 웬만하면 남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잔존 성곽하단부

그래도 설레었다. 고성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 전까지는 그저 상상속의 성이었다. 이미 다양한 자료와 선행연구들이 있었음에도 아무생각이 없었던 나의 무지함을 반성할 따름이다.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남문터


남문터

남문터 남쪽 동네 지명이 '남문통'이고 이 동네를 감싸고 있는 길이 전형적인 성굽길의 형태이다.

애초에 성을 축조할 때 진입로도 같이 계획했다는 증거이다.

그런 연유로 이곳이 남문터가 확실하다.

남문통에는 군위오씨 집안이 살았다고한다.

■ 잔존 성곽 구간(고성리 1400-5번지일대)


아파트공사 토공사 진행중(현재-2019.3)

LH공사가 2007년에 사업승인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12년만에 아파트 공사를 진행중이다. 2004년에 문화예술재단에서 수행한 '비지정문화재 조사보고서' 에서 성곽의 보존과 문화재지정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은 사업승인을 내주었다. 그때에도 성곽의 존재는 뚜렷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성곽을 보존하는 조건으로 설계변경을 하여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성곽 기단부 잔존구간

346세대가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 조형물처럼 쓸쓸히 묻혀질 고성의 600년 세월이 허무하기만 하다. 원형을 복원한답시고 쓸데없이 손대지 말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흉내만 낸 박제품을 만드느니 비록 원형은 훼손되었지만 세월의 흔적 그대로 살아있는 지금의 모습으로 남겨두란 뜻이다.

■송두옥(1850~1922)

지난번 종달리편에 소개한 채구석과 함께 구한말 제주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이 분은 당대에 제주 최고의 갑부이자 무관으로 제주현감, 대정군수, 정의군수를 지냈다. 사재를 털어 여러번 구휼미를 내기도 했다. 당시 18척의 선단을 꾸려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했고 담대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제주의 유림을 주름잡기도 했다.

[김윤식은 『속음청사』에서 송두옥에 대하여 ‘송대정(宋大靜)은 제주읍 사람으로 나이는 40여세, 너그럽고 후하여 민심을 얻고 있다. 제주 대정 정의 3읍 관(官)을 두루 역임했고 집안이 부유하나 남의 원망을 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출처-고영철,제주환경일보(2017.6.22)

당시 제주읍내에 현 동문수산시장 일대(옛 향교전 부지) 약 3,500평을 비롯해서 도내 곳곳에 수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당대 최고 부자였다.


저류지로 변한 옛날의 송두옥 소유 논자리

송두옥 이분을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고성 동문 밖 논이었던 광활한 토지의 소유주였기 때문이다. 1914년 지적원도를 보면 지금 LH공사가 진행하는 아파트부지의 대부분과 인접한 저류지(과거 논)가 모두 그 분의 소유였다. 동(東)물골른밧이라 부르던 곳이다. 제주어로 동쪽에 물이 고인 밭이라는 뜻이다. 물론 방향의 기준은 고성이다. 특이한 점은 답(畓,논)은 소유했으되 전(田,밭)은 소유하지 않은 점이다.

동갑내기이고 역시 대정군수를 지냈던 채구석도 종달리에서 바다를 매립하여 답(畓,논)을 소유하지 않았던가.


탐라순력도의 수산성조(고정의현성을 구수산고성으로 표기)-사진출처 문화컨텐츠닷컴

탐라순력도에서도 고성을 바닷가와 인접해 그려 놓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매립지임이 분명해 보인다.

당대에 대정군수도 같이 역임한 동갑내기 인물인 채구석을 몰랐을리 없고 오히려 친구로 지냈을 것이다. 채구석이 종달리 지미봉 아래 바다를 메웠다면 송두옥은 고성 동쪽 바다를 메우고 논을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고성을 허물고 그 돌들을 가져다 쓴건 아닐까.


아파트공사중인 송두옥의 답(畓,논) 터

아파트 기초공사 현장에서 파내 쌓인 돌들과 가득 고인 물들이 그 가능성에 무게를 더한다.

채구석과 송두옥의 논들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갈대습지로 변해버린 점도 똑 같다.

두 양반이 매립사업 실패 후 술 한상 차려놓고 마주했으리라 상상해 본다. 서로 탓을 하든 위로를 하든 .

아파트 공사는 기초공사에 꽤 애를 먹을것 같다. 계속 물이 나오고 지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요즘 건설기술로 안되는게 없지만 그 비용은 고스란히 분양가에 반영될 것이다.

■동문터


동문터

동문터 역시 남문과 마찬가지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폐성된지 거의 600년이 되었으니 성문은 진작에 없어지고 길만 남았을거다. 성곽은 야금야금 허물어져 갔을 것이고.

남문과 달리 동문밖에는 성굽길이 S자형태로 나 있지 않다. 송두옥의 논이 매립지였다면 동문 밖은 나오자 마자 바다이기 때문에 S자 성굽길을 만들 수도, 만들 이유도 없었으리라 짐작한다.


고성 성안 길가의 돌담 풍경

동문밖의 옛길은 오조리로 이어진다.

■원터(院-)


원터가는 길 입구 정경

성안길을 따라 원터가는 길목은 돌담과 귤밭, 낮은 지붕들의 조화가 제주 옛 마을 원풍경의 극치를 보여준다. 감히 한 폭의 그림으로도 담아 낼 수 없다. 작위적으로 복원된 민속마을 풍경과는 비교할 수 없다. 세월을 담아내고 삶이 그려낸 살아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만난건 걷는자만의 특권이다.

인위적인 복원 보다는 보존이 더 앞선 가치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원터 현재 - 사진출처, 고정의현성 복원 및 활용 방안 수립연구 용역(2017)

고정의현성 용역보고서에 의하면 ' 성산읍 고성리 묵은성의 성안동네 북성 안쪽(고성리 1360-2번지)에 있는 터를 이른다. 정의현성을 쌓은 뒤에 현감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확한 자료를 찾아보지 못했지만 이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보고서에도 표기되어 있는 원터의 원(院)이 의미하는 뜻은 조선시대 관원들이 공무를 다닐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서울 노원구에는 노원(蘆院)이 있었고, 전국 각지에 원이 있던 자리에 수많은 '원터' 또는 '원터마을'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고성이 약 7년 밖에 기능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감이 살았던 곳이라기 보다는 폐성 후에 관리들의 출장 숙소로서의 기능을 했던 원(院)이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감의 숙소였던 곳이 폐성되면서 그 집이 원(院)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개자리동산

성안동네 고성리 1349번지 바로 남쪽 삼거리 일대이다.


개자리동산

지명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삼거리 한가운데 오래된 퐁낭이 있고 쉼터를 만들었다. 고즈넉한 풍광이 성안의 정취를 잘 담아내는 장소이다.

잠시 앉아 봄 햇살을 받으며 성안사람이 되어본다.

■고성북측성곽

원터 옆으로 샛길로 들어서니 과수원이 나온다. 북측 성곽 흔적이 혹시 있을까 하여 과수원을 통과해 50미터정도 들어가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마치 베일을 벗듯 600년을 지켜온 고성의 자태가 드러났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발견한 이와 비견할 순 없겠지만, 거의 온전히 남아 있는 성곽을 보는 순간의 전율은 가보지 않은 이는 모를 것이다.


고성 북측성곽(안측)

전술한대로 2004년 문화예술재단에서 수행한 '비지정문화재 조사보고서'와 2017년 ' 고정의현성 복원 및 활용 방안 수립연구 용역'보고서의 존재를 몰랐던 필자에겐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북측성곽의 외측구간

성곽의 바깥에서 보니 높이가 5미터 이상이 된다. 성의 웅장한 자태는 성밖에서 더 잘 드러나 있었다. 기단폭이 10미터나 되는 구간도 있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제주성의 자태가 이랬을 것이다. 오현단의 성지나 성읍 정의현성처럼 박제로 복원된 성의 모습이 아니라 600년을 지켜온 원래 그 성이다.


고성 문화재(향토유산) 지정구간 : 용역보고서엔 성곽의 잔존구관과 변형구간, 유실구간등에 대해 상세히 표기되어 있다. 성곽 주변 사유지를 매입하여 문화재지정을 추진하고, 추후 복원 및 활용방안에 대한 제안을 하고 있다 -출처, 고 정의현성 복원 및 활용 방안 수립연구 용역(2017)

고성이 아직도 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않은 사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제주도의 방어유적을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국한해서 그곳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인가. 7년만에 폐성이 된것도 서러운데 사람들은 아예 몰라준다. 사람들이 외면한 까닭에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하물며 조선시대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비석도 문화재로 지정하는데 이건 아니다.

그간 고성의 존재를 몰랐거나, 알았어도 그 가치를 몰랐거나, 가치를 알았어도 지정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서야 나온 용역보고서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뒤늦게라도 문화재로 등록되어 잘 보존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단 누누히 얘기하지만 섣부른 복원은 제발 하지 않기를 바란다. 성곽을 감싼 덩쿨도 웬만하면 그대로 놔두자. 무너진 곳은 무너진대로 놔두자. 그게 고성만이 가진 매력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협자연대

고성리엔 문화재가 딱 하나 있다. 신양 섭지코지에 위치한 협자연대이다. 제주도 기념물 제23-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름 보존상태가 좋아 연대의 원형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한다. 협자연대와 더불어 조속히 고성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었으면 하는 바램 간절하다.


오조리와 경계를 이루는 성뒷길가에 핀 배추꽃

고성의 성곽을 발견(?)한 흥분을 잠시 가라앉히고 유채로 오인되어 역시 존재가 서러운 배추꽃 내음을 맡으며 걸음을 옮긴다.

■ 묵은 연디(연대)


수산리와 묵은연디로 가는 길

고성 북쪽 성뒷길을 지나 수산방향으로 향한다. 양옆으로 나즈막한 돌담이 쌓인 좁은 길이다. 바닥만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여간 호사가 아니다. 걷는자 만의 특권이다. 들려오는 휘파람 새소리는 보너스다.


묵은 연디

묵은 연디(연대)도 주인과 운명을 같이 했다. 고성이 폐성된 이후 이 연대도 버려져 600년의 세월을 견뎌 왔다. 고성이 버려지기 전 지미봉수와 대수산봉수(큰물뫼오름봉수)와 연계하여 신호를 받아 옛 정의현감에게 알리던 연대라고 한다.

그 긴 세월동안 아직도 남아 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고 보존이 시급해 보인다.

제주도내 훼손되어 사라진 봉수나 연대도 원형과 상관없이 버젓이 새로 쌓는 판국에 600년된 연대가 돌봐주는 이 없이 스스로 아직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개조심

오조리에선 '외상사절'이라는 잊혀진 문구가 보이더니 수산리 어귀에선 '개조심'문구가 반긴다. 개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보단 글귀가 반가운 마음애 폰카메라를 얼른 대보았다.


어느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공간으로 보이는 옛 창고

■수산리(水山里)

수산(水山)이 수산(首山)이라는 지명으로 표기된 기록들이 있다. 수산이라는 명칭은 고성리에 소재한 대수산봉(大水山峰) 즉 '큰물뫼오름' 명칭에서 알수있 듯 물뫼마을 즉 수산촌(水山村)에서 유래한다.

수산(首山)이라는 표기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중반의 '탐라지1653년)', '남사일록

(1680년)', '탐라순력도(1702년)'에만 나타나 있고, 그 이전의 김상헌의 '남사록(1601년)' 과 그 이후의 '증보탐라지 (1766년)'에는 다시 수산(水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즉 17세기를 전후로 약 100년 정도만 수산(首山)으로 표기한 것이다.


봄의 정경이 물씬 풍겨나는 수산의 어느 목장

예전엔 수산평(水山平)이라고 불릴 정도로 용암이 빚은 광활한 초지가 펼쳐져 있어 말을 키우기에 좋은 여건이었다고 한다. 아직도 수산리 서쪽 일대엔 수산뱅듸의 너른 벌판과 마소에 물을 먹이던 한못이 남아 있다.

인근 온평리에 제2공항이 들어선다면 이 곳의 풍광은 더 이상 제주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개발의 논리는 이해 당사자들의 첨예한 대립속에서 항상 이겨왔다. 그래서 불안하다. 이해 당사자 모두 자기들의 합당한 논리가 있겠지만 제주를 제주답게 남겨두면 안되는 것인가. 득보다 실이 많은게 제2공항 건설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옛날 연못이 있던 자리.지금은 저류지의 기능을 한다.

■ 수산진성


탐라순력도 수산성조의 수산진-출처 문화컨텐츠닷컴

제주의 9개 진(화북진, 별방진, 수산진 등)중의 하나이다.

"1493년(세종 21)에 도안무사(都按撫使) 한승순(韓承舜)이 축조하였는데, 당시 성의 둘레는 3,841m이고 높이는 53m라고 전해진다. 서쪽의 차귀성과 함께 동쪽에서 침입해 오는 왜구를 막기 위한 성으로, 다른 '진성'들이 해안가에 있는 것과는 달리 중산간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현존하는 성의 둘레는 352.72m(1164척)이고 높이는 4.84m(16척)이다. 성 안에는 해방 직전까지 병사와 객사, 민가들이 있었으나 제주 4.3사건을 거치면서 모두 소실되었다.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는 지점에는 폭 6.1m, 담 높이 2m 규모의 ‘진안할망당’ 이 있는데, 이곳은 성을 축조할 때 공출을 내지 못한 부모 대신 희생된 아기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성의 원형과 유구 등이 잘 남아 있어 보존상태가 좋고, 축조 방식과 평면 형태가 특이하여 2005년 10월 5일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수산진성 [水山鎭城] (두산백과)


수산진성의 내부 모습

수산진성의 성곽은 지금 수산초등학교 담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수산초 학생들은 유서가 깊은 역사적 공간 안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수산초등학교

수산초 교정은 아담하면서도 잘 단정되어 있다. 도시의 학교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좋은 환경이다.

수산초등학교는 1946년에 개교하였다.

1993년 제주도지 1권의 자료를 보면 제주도에서 가장 일찍 설립된 학교는 제주북초등학교의 전신인 제주 보통학교이다.(1907년 5월 19일 개교)


1914년 지적원도의 정의공립보통학교

정의보통공립학교는 수산진이었던 이곳에서 1909년에 설립되었다. 수산초등학교가 이 자리에서 1946년에 개교하였다면 전신을 정의보통공립학교로 보야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제주북초등학교와 함께 도내 가장 오래된 학교중의 하나일텐데 말이다. 사연이 궁금하다. 수산초 출신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여담이다.

■빛의 벙커


빛의벙커가는 길

빛의 벙커는 제주커피박물관 바움 경내에 있는 관람시설이다.


이곳은 원래 한국통신(KT의 전신)의 광케이블관련 시설이었다. 1980년대 말에 제주에서 전남 고흥,해남과 연결된 광케이블을 관리하던 '가'급의 국가 주요시설이었다. 시설이 폐쇄된 후 개인에게 매각하여 관리동은 커피박물관으로 운용되고 있고 벙커시설은 최근 빛예술을 주제로한 관람시설로 변모하였다.


한국통신 벙커 내부(관람시설로 개조전 사진)

콘크리트 벽두께가 3m이고 지붕은 1m슬라브가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흙을 덮어 나무를 심어 놓았다. 실내규모가 900평이라고 하니 엄청난 벙커시설이다.

제주에서 이런 시설의 존재하였다는 것이 놀랍다.

광고가 아니니 오해 않기를 바란다.


발걸음을 옮겨 출발지인 무근장터거리로 향하는 길에 다시 마주하는 고성리의 옛 길은 역시 정겹다.


군데군데 아직 지지않고 싱싱한 동백꽃이 걸음을 가볍게한다. 동백은 겨울꽃이기도 하지만 봄꽃이기도 한 것 같다.


고성리의 모습-새건물들과 옛집들, 귤밭이 동시에 공존한다

고성리는 제주의 전형적인 고즈넉한 마을 안길을 품고 있지만 일주도로변으로는 도시화가 많이 진행되어 있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옛것들을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는 마음도 간절하다.

제주도 전체가 그렇듯 옛날과 현재, 그리고 미래가 첨예하게 부딪히면서 아름다운 자연 환경속에 공존하는 고성리이다.


수산초 교정의 활짝 핀 벚꽃

이제 완연한 봄이다.


입회비 및 후원계좌 : 제주은행 6901008085
(예금주:사단법인 제주문화역사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