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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리 시흥리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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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리의 송난포구에서 출발하여 말산메와 두산봉, 시흥리 마을 안길을 둘러보는 코스입니다.

■송난포구


송난포구 전경

시흥리 동쪽에 돌출된 송난코지에 위치한 포구이다. 송나라 때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송란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역사적 고증은 없지만 주변에서 많은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송난포구 주변 모래펄

수심이 얕은 모래펄 지형이라 포구를 만들기가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수심을 확보할 수 있는 코지(곶)에 돌을 날라 포구를 만들었다. 주변지형이 온통 모래 뿐이니 포구를 만들 때 그 수고로움이 제주의 다른 동네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짐작해본다. 변변한 장비도 없던 그 옛날 돌의 운반에도 고충이 많았겠지만, 얕은 수심때문에 바닥의 모래를 퍼서 필요한 수심을 확보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흥리 사람들은 소중한 포구를 어렵사리 얻었다.



우도와 연결된 듯 보이는 신 방파제

옛날 포구 밖으로 바다로 길게 이어져 작은 섬을 연결하는 새로 난 방파제가 발길을 이끈다. 지미봉과 우도, 일출봉이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 온다.

송난포구는 시흥리와 바다를 이어주던 유일한 포구이나 썰물 때는 바닥이 거의 드러나 배가 드나들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주변의 넓은 모래펄은 조개잡이도 가능하다.


해안도로 개설로 생긴 유수지

해안도로가 개설되면서 포구 서편의 바다는 둘로 나뉘어져 도로 안쪽의 바다는 유수지가 되었다. 마을에선 이 유수지의 활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데, 좋은 방향으로 사업이 진행되길 바란다.

■ 호국영웅 강승우 중위


강승우 중위 기념비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은 전쟁포로의 교환 문제로 휴전회담이 장기화되면서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소모적인 국지전이 전개된다.

그 중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총공세 속에서 15일까지 10일동안 주인이 7번이나 바뀐 백마고지의 전투는 치열하기로 유명하다.

고 강승우 중위는 시흥리 출신으로 6.25가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였고, 1951년 갑종간부 7기생으로 소위로 임관한다.

국군 제9사단 소속이었던 그는 6‧25 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의 기관총 세례에 국군의 피해가 많이 발생하자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와 함께 박격포탄, 수류탄 등을 들고 육탄으로 돌격해 적 기관총 진지 3곳을 격파하고 전사한다. 이 세사람은 백마 3군신으로 불리며 호국영웅로서 추앙받고 있다.



전쟁기념관 내 백마고지 육탄 3용사상(좌로부터 오규봉하사, 강승우중위,안영권하사)ㅡ출처 전쟁기념관 블로그

강승우 중위는 사후 1953년 7월 1일 금성 을지무공훈장과 일계급특진을 추서받았고, 1953년 5월3일 미국 은성훈장도 추서받았다. 1995년 4월에는 전쟁기념사업회의 ‘100인의 호국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4.3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발발한 6.25는 우리민족의 비극이었다. 섬 청년 강승우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4.3의 광풍은 그도 피해갈 수 없었고 혼란의 시기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판단의 여지는 혼돈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바다 건너 육지에서 들려오는 민족끼리의 전쟁 소식은 두살배기 어린 아들과 어여쁜 부인을 고향에 남겨둔 채 섬청년 강승우를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뛰어들게 했다.

수류탄과 박격포탄을 들고 적 기관총진지를 제압한다는건 바로 죽음이 예정된 일이다. 적의 기관총에 스러져가는 전우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강승우는 결국 그렇게 몸을 스스로 던져 젊은 생을 마감했다.

스물세살 제주섬 청년이 죽음을 각오할때 그의 마음속엔 사무치도록 그리운 아들과 아내 얼굴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 흘렸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절로 숙연해진다.


호국영웅 강승우 로

참고로 전쟁기념사업회에서 선정한 6.25전쟁 호국 인물 100인 중 제주출신이 네 분 있는데

고태문 대위, 김문성 중위,강승우 중위,한규택 상병이 그 분들이다. 이 분들을 기리는 흉상이 제주시 신산공원에 건립되어 있다.

■시흥리 영등하르방



 

영등하르방 상

강승우 중위 기념비 바로 옆에 위치한다. 마을에 원인모를 화재가 자주 발생하자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이 석상을 세우니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의 위치에서 40미터정도 이동하여 재설치하면서 기단도 방사탑 형태로 높여 놓았다. 돌하르방과 유사한 형상을 하고 있으나 높이는 70cm정도로 아담하다.

■두산봉(말매오름,멀미오름)



두산봉과 말산메 위성사진ㅡ출처 네이버지도

두산봉은 말매오름이라고도 하는데 종달리와 시흥리에 걸쳐져 있는 오름이다.

네이버 지도에서는 두산봉과 말산메가 구분되어 표기되어 있는데 실은 둘을 합쳐 두산봉이라고도 하고 말산이라고도 한다.

일제시대 때 발간된 '조선지형도'에도 산 전체를 두산으로 표기하고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말산(末山)', 『탐라지』에는 '두산(斗山)', 『제주읍지』에는 '두산악(斗山岳)' 등으로 표기했다.

『탐라순력도』(한라장촉), 『제주삼읍도총지도』 에는 '두산(斗山)', 『제주군읍지』의 「제주지도」에는 '마악(馬岳)'으로 기재되어 있다.

(본 글에서는 내용전달의 편의상 두산봉과 말산메를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견고한 성곽을 연상케 하는 두산봉의 동측 외곽 절벽

두산봉은 제주의 오름 360여개 중 몇개 안되는 수성화산체이다. 해저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둥근 링 형태의 '응회환'이 형성되었고, 지반이 융기한 후 내부 분화구에서 다시 용암이 분출하여 전형적인 분석구(噴石丘)를 형성하고 있는 특이한 지형이다. 위성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둥근 링형태로 마치 성곽처럼 형성되어 있고(두산봉) 그 안에 2차적으로 생긴 오름(말산메)이 보인다. 아마도 2차에 발생한 화산폭발에 의해 용암이 서쪽으로 흐르면서 성곽같은 산세를 허물어서 완만한 지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말산메 정상

제주의 오름 대부분이 한라산의 형성 이후 육상에서 생긴 기생화산(측화산)이며 이러한 형태의 화산을 분석구라고 한다.

반면에 수중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만들어진 것을 수성화산체라고 하는데 두산봉과 성산일출봉, 송악산, 차귀도와 수월봉, 우도, 입산봉등이 그것이다.

수성화산은 폭발하는 수심에 따라 산의 형상이 달라지는데 비교적 얕은 곳에서 폭발하여 생긴 것을 '응회구'라고 한다. 분화구의 높이가 높은게 특징이며, 성산일출봉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깊은 수심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높이에 넓은 면적을 가지는 둥근 링 형태의 지형을 만드는데 이를 '응회환'이라고 하며 이를 육안으로 뚜렷이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두산봉인 것이다.


두산봉 북측에서 말산메로 오르는 길

완만한 경사의 북쪽 탐방로는 올레길 1코스이기도 하다. 걷기가 편하다. 이런 완만한 경사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점성이 낮은 용암이 서서히 흘러내리면서 다져놓은 길이다. 용암이 흘렀던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 정상으로 간다. 시간도 공간도 역행하는 느낌이다.


말산메 입구

맑은 공기를 마시며 올레1코스 이정표를 따라 걷다보면 말산메로 들어서는 철제로된 파란 입구가 보인다. 말이나 소가 넘나들지 못하도록 진입구를 ㄷ자형태로 만들었다. 왠지 낯이 익다. 어릴적 영화관 매표소 앞에 저렇게 해놓은 기억이 난다. 새치기 방지용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볼 수 없는 지나간 추억의 한조각이다.


말산메 정상으로 오르는 길

말산메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탁 트인 공간이다. 무성한 잡초사이로 등반객들이 발길로 다져놓은 한줄기 길이 정상으로 안내한다.

오르는 길엔 성산포 바다가 펼쳐지고, 일출봉과 우도가 나그네를 반긴다. 고개를 돌리면 제주 동부지역의 오름들이 하나씩 머리를 내민다. 눈앞에 펼쳐질 풍경의 기대감에 정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오히려 가볍다.


말산메 정상

말산메 정상이다. 비록 145미터의 낮은 오름이지만 제주 동부지역의 풍광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정상에서 360도 경치를 볼 수 있는 오름은 몇 안될거다. 나무에 가리든, 지형적인 이유든 사방의 경치를 한눈에 내어주지는 않는다.


말산메 정상에서 보이는 오름군



말산메 정상에서 보이는 지미봉과 우도, 성산일출봉

그러나 여기는 다르다. 두산봉이 말산메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면, 말산메는 제주 동부의 풍광을 품안에 끌어안고 있다가 나그네에게 오롯이 내어준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산을 오르는 수고로움이랄 것도 없이 거저 얻은 기분이다. 꼭 가보길 권한다. 생수 한병에 가벼운 운동화 차림이면 된다. 땀 닦을 수건도 필요없다.



습지

두산봉으로 가던 길 중간에 작은 습지가 보인다.

질퍽거리는 젖은 땅처럼 보이지만 습지가 맞다. 이곳에 목을 축이러 왔던 노루 발자국이 선명하다.

깊은 산속 맑디 맑은 옹달샘은 아닐지라도 누군가는 부지런히 드나든 것이다.


두산봉 정상으로 향하는길

말산메 정상으로 오르는길은 행정구역상 종달리이다. 두산봉으로 가는 길은 시흥리에 속한다.

산이 두개의 리에 걸쳐져 있다. 역시 올레길 1코스 구간이다. 단정히 자라준 소나무 숲이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마치 성을 지키는 병사들처럼 겨울바람에도 올곧게 서있다.


두산봉 정상

말산메든 두산봉이든 정상에 오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작은 수고로움으로 너무 많은 것을 얻었다. 횡재한 기분이랄까.


두산봉정상에서보이는 우도와 성산일출봉

두산봉에서 내려오는길도 무난하다. 거대한 토성 성곽위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바깥쪽으로는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고 안쪽으로는 조금은 급한 경사지에 소나무들이 빽빽하다.


두산봉 진출입구

두산봉을 하산할때 역시 옛날 극장 매표소앞에 있던 철제 구조물이 나그네를 환송한다. 지금부턴 경사진 내리막길이다.

눈에 새긴 풍광의 잔상을 안고서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간다. 기대이상으로 아름다운 두산봉이다.


두산봉 입구와 올레 1코스 안내소

두산봉입구에서 동쪽으로 약 100m 못가는 지점에 올레길 1코스 안내소가 있다.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리고 시흥리 마을길로 떠난다.

■시흥리(始興里)


심돌마을로 불리던 지명이 1904년 정의군수 차수광 시절 『시흥리(始興里)』로 마을 이름을 바꾼다. 당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의군에 속했던 종달리가 지금의 제주시 구좌읍으로 편입이 되면서 시흥리는 서귀포시 동쪽 첫마을이 되었다. 옛 정의군과 제주목 경계에 있어 정의군의 시작이 되는 마을이고 흥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마을호수는 약 200여 호였다.


두산봉에서 시흥리로 가는 길

올레 1코스와 헤어져 시흥리로 발걸음을 옮기니 멀리서 성산일출봉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여느 제주의 시골길처럼 밭담사이로 길이 이어져 있다.


두산봉 응회환의 지층

두산봉은 비교적 수심이 있는 바다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화산재가 둥근형태로 쌓여 굳어진 응회환이라고 앞서 설명했다. 시흥리로 가는 길에 두산봉은 자신의 속살을 보여준다. 먼 옛날 화산의 분출물이 켜켜이 쌓여 굳어진 지층의 모습을 보란듯이 내어주고 있다.

제주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지질공원답게 닿는 발길마다 지질학적 특징을 느낄 수 있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정말 그말이 맞다. 필자도 예전엔 그저 절벽이려니 했으니까.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고향 제주의 속살을 느낄 수 있는 소박한 나들이가 정말 좋다. 느낌이 좋다.


배추꽃과 두산봉

한적한 밭담길을 걷다 살짝 무료해질 무렵 뜻하지 않게 만난 꽃밭이다. 한겨울에 핀 노란 꽃밭. 관광을 목적으로 일찍 파종한 꽃이 아니다. 내버려둔 밭에서 절로 피어난 배추꽃이다. 배추꽃과 유채꽃은 육안으로 구분이 힘들다. 다만 잎사귀로 판단할 뿐이다.

겨울 제주의 들녁 곳곳엔 이처럼 버려진 듯 무심하게 피어있는 배추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길가 한 귀퉁이에도 피어 있고 밭 한가운데에도 피어 있다. 밭 주인은 그저 내버려 둘 뿐이다. 힘든 겨울을 나는 동안에 꽃을 피워내는 정성이 갸륵해서 일까.

배추꽃의 내음은 닮은 생김새 만큼이나 유채꽃과 구분이 안간다. 배추꽃 향기에 취하면서 코도 호강한다. 물론 그 내음에 호불호가 있지만 난 그저 좋다. 따뜻했던 한겨울 나들이에서 만난 뜻밖의 행운이다.

유채가 자연종 배추와 양배추간의 이종간 자연 교잡으로 생긴 종이라는 것, 이를 우장춘박사가 밝혀내어 당시 식물학계가 발칵 뒤집혔다는 사실은 덤으로 알게 되었다. 결국 유채나 배추나 한 형제였던 것이다.


수확이 끝난(?)무우밭

마을 곳곳에 무우밭이 있다. 제주는 당근과 더불어 월동 무우의 최대산지이다. 구좌읍을 비롯한 제주의 동쪽지형이 무우를 재배하기에 적합하다. 두산봉 안팍으로도 무우밭이 끝없을 정도로 자리한다. 올해는 무우값이 폭락하여 농민들이 울상이다. 수확을 안하고 내버려둔 밭이 지천이고 갈아엎은 곳도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자연의 이치와는 다르게 사람사는 세상은 이처럼 복잡하다.


빌레에 조성한 작은 분재원(?)

시흥마을 초입, 집주인은 집앞의 거대한 빌레를 화분삼아 자신만의 분재를 만들었다. 마을안에 위치한 거대한 빌레도 놀랍거니와, 빌레의 틈새에 흙을 다져놓고 소나무와 화초를 정성스레 심어 놓았다.


빌레에 심어진 소나무와 화초

사진찍기를 흔쾌히 허락하시는 주인장의 목소리에서 뿌듯함이 배어있다. 걷는 이만이 접할 수 있는 특권이다. 시흥을 들르면 한번쯤 가볼만하다.


시흥리 마을 안길


길가의 폭낭

올레의 한켠에 오래된 돌담과 폭낭이 서로 의지하며 겨울을 나고 있다.


제주의 여느 마을처럼 시흥리의 겨울은 고즈넉한 분위기로 나그네를 맞는다.

시흥리 마을 안길을 거쳐 어느덧 출발지인 송난포구로 돌아왔다.

따뜻했던 겨울 여정이 끝나간다.




입회비 및 후원계좌 : 제주은행 6901008085
(예금주:사단법인 제주문화역사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