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리 종달리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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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나들이 9차 코스입니다.
제주역사 나들이 9차 탐방코스는 하도리 금붕사에서 출발하여 하도 철새도래지, 지미봉과 종달리 마을 일대,간척지를 경유하는 코스입니다.
■금붕사
금붕사는 하도리 99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제주교구 사찰이다.
창건시기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1926년 10월에 새로 창건했다. 1938년 5월 법당을 신축한 이래 신도 수가 증가하면서 발전했으나, 제주4·3사건 당시 토벌대에 쫓기던 동네 주민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사찰 전체가 불태워지고, 이성봉스님이 총살당했다. 1960년대에 사찰 재건 사업으로 현재에 이른다.
금붕사에는 오백라한상을 그린 오래된 불화가 있다.
[1995년경 만난 주지스님의 이야기로는 '제주대학교 모 교수가 보고 조선 초기 작품으로 보인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2008년 2월에 만난 스님의 말은 "원광대 불교미술전공 교수가 보고 말하기를 200년 이상 된 작품이라고 감정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다른 탱화들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황인·백인·흑인이 모두 등장하고 있다. 둘째, 인물의 표정과 시선 방향·동작이 모두 제각각이다. 세째, 등장인물의 복식(服飾)이 옛 중국 옷을 닮았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이런 모습을 그린 불화는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1995년경에 만난 주지스님이 '처음 이 절에 왔을 때부터 걸려 있었는데 배접한 종이가 가루처럼 부식되어서 궤 속에 보관하기를 20년쯤 하고 나서 최근에 다시 표구해서 대웅전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추정컨대, 이 그림은 중국에서 그려진 것이 어떤 경로로 우리 나라에 들어왔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이 절을 창건한 스님이 육지부에서 구해 가지고 와서 모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금은 액자에 넣었는데 유리를 끼웠다.] 출처-고영철의 역사교실
■신착개 간척사업지
잡초와 갈대가 무성한 낯선풍경이 지미봉을 정점으로 광활하게 펼쳐진다. 종달리 1659-6번지에서 1673-1번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이곳은 제주의 여느 들녁과는 사뭇다르다.
지금은 버려진 듯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며 무성한 잎새들 사이로 철새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한 곳이다. 이 곳을 지금도 가로지르고 있는 오래된 수로는 이곳에 농사를 지었던 흔적이다.
이곳은 간척지였다.
원래 이곳은 지미봉 남서측까지 물길이 휘감는 지형이었다. 위 사진의 탐라순력도 별방조점을 보면 지미망(지미봉)을 휘감은 바닷길이 확연하고 배를 댔던 용항포와 신착개가 있었다.
별방조점과 1914년도 지적도를 근거로 과거의 지형을 추정해 보았다. 하도리 창흥동엔 용항포라고 불리던 선착장이 있었고 지미봉을 휘돌아 종달리 뒷편엔 신착개가 있었다. 다만 조수 간만을 잘 맞추어야 배를 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얕은 수심과 모래펄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근처에 발견된 여러 곳의 조개무지가 그걸 증명한다. 그리고 곳곳에서 끝없이 용천수가 바닥에서 샘솟았다. 이를 탕탕물이라 했다.
위의 표지석을 보면 대정군수를 지낸 채구석(1850-1920)이 1899년에 간척사업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 후 구례현감을 지냈던 함덕출신 송상순(1842-1921)이 매입하여 대대적으로 간척사업을 하여 바다 쪽은 양어장으로 안쪽은 논으로 개간하였다고 한다.
채구석은 제주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으로 불리는 신축교난을 배경으로 한 현기영의 소설 '변방의 우짖는 새'에도 등장한다. 이재수는 그가 부리던 하인이었다. 그는 이재수의 난 때 프랑스 신부의 처형 만큼은 극구 말려 제주에 더 큰 화가 미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채구석이 진사시험을 합격하고 교지를 받으러 한양에 갔을 때 갓을 파는 상인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채똑똑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한양을 오갈 때 제주 촌놈 채구석에게는 호남지대의 끝없는 논이 눈에 들어왔을 거다.
조선왕조실록 고종편에 보면 채구석은 제주판관시절에 녹봉을 털어 백성들의 구휼에도 힘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성정의 채구석은 호남 곡창지대의 나록밭을 보면서 우리 제주사람들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쌀이 거의 나지않아 고이 모셨던 쌀 한 줌으로 겨우 제사를 지내던 곳이니.
쌀을 생산하는 논에 대한 열정은 그 때 생겼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이 그랬을 거라는 거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거다. 물이 많은 이곳을 메워 논을 만들고 쌀을 재배하자고. 그러나 그의 사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메운땅이 꺼지고 바닷물이 올라와 결국 못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재수의 난으로 우여곡절 끝에 사형을 면하고 수형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 천제연의 물길을 끌어 중문에 7만평이라는 논을 기어코 만든다. 변변한 장비가 없던 그 당시 바위를 뚫고 물길을 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그는 해냈다. 그 귀하게 만든 논 자리엔 중문관광단지가 들어서고 컨벤션센터가 자리한다. 어렵사리 일군 그 논 한자락이라도 남겨두지 않은 점은 아쉬움이 크다.
애경그룹 창시자이자 장영신 회장의 남편인 고 채몽인이 그의 5남이다. 생년을 따져보니 채구석군수가 67세에 본 아들이다. 정말 대단한 위인이다.
■하도 철새도래지
하도리 동쪽에서 종달리 서쪽에 걸쳐 위치한 철새도래지이다. 제주지형에서 보기드문 기수지역으로 바닷물과 용천수가 혼입되어 독특한 식생이 분포하고 새들의 먹이가되는 생물들이 많아 이곳을 중간 기점으로하는 철새들의 안식처이다. 제주의 4군데 철새도래지 중 으뜸이다. 조류독감에 대비하여 방역당국이 긴장을 늦추지 않는 곳이다.
이 곳 철새도래지의 기수지역 둘레는 약 3.7km이다. 30여종의 철새가 발견되며 멸종위기종인 황새도 드나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다.
가을하늘 아래에서의 철새도래지 풍경은 기대이상이다. 감탄할 틈도 없이 멋진 풍경이 이어진다. 수북한 털을 머금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그 옆에선 질새라 억새가 고개를 든다. 갈대가 있음은 이곳이 민물을 머금은 습지라는 의미다. 제주들판을 온통 뒤덮는 억새도 이곳에선 물가에서 한발치 떨어져 가을 풍경에 덧칠을 하고 있다.
원래 이곳 철새도래지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지형이었다. 예전엔 이곳을 용목잇개로 불렀으며 배들이 드나들던 용항포가 있었다. 탕탕물, 서느렁물등 맑은 용천수가 샘솟았던 곳이다. 용항포가 있었던 자리는 간척사업으로 매립되었는데 2003년에 농업기반공사가 이 곳 일대 8000여평을 평당 22,000원의 헐값으로 민간에게 매각해 버렸다. 당시 주민들이 분통 터질 만한 사안이었다. 중앙지 1곳에만 매각공고를 내어 주민들이 알 수 없었고, 행정절차상 아무 문제없다는 이유만 들었다고 한다. 절대보존지구라 개발행위를 할 수 없다지만 양어장시설의 흔적인 듯 버려진 옛 건물이 방치되어 있어 풍경을 훼손하고 있다.
1959년 바닷길에 제방을 쌓고 바닷물의 유입을 막아 농경지로 활용하려했으나 지반이 약하고 해수유입등으로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습지인 지금의 철새도래지가 형성되었다.
갈대
도래지 수면에 떠있는 가을 구름
갈대는 습지에서 자라고 억새는 제주 들녁 어디에서나 자란다. 보통 갈대와 억새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위의 사진을 보면 명확히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둘다 가을을 대표한다.
'짝사랑'이라는 노래가 있다. 1936년도에 고복수가 부른 노래다.
'아 으악새 슬피 우니~'로 시작하는 유명한 노래이다. 가을을 노래했지만 일제시대 암울한 우리 현실을 잘 표현한 노래이다.
으악새가 무슨 새인지 궁금해 한다. 으악새는 새가 아니라 '억새'라고 한다. 억새의 경기도 방언이 으악새이다. 그래서 억새가 슬피운다고 시적인 가사를 붙였다고 생각했다. 그간 정설로 알았다. 그러나 반전이 있을 줄이야.
정작 작사가는 이 노랫말을 지을때 '으악 으악'하는 새소리를 듣고 작사했다고 한다. 뻐꾹새, 뜸북새, 소쩍새 등등 울음소리로 이름을 가진 새들이 많다. 소리가 고약하지만 '으악 으악' 울어 으악새다. 꿩도 숫놈은 꿔~엉하고 운다. 으악새는 왜가리일 확률이 높다. 왜가리의 북한 사투리가 왁새이다. 혹자는 왜가리의 사투리가 으악새라고도 한다. 왜가리는 남부지방에선 텃새이기도 하지만 북쪽지역에선 가을에 남쪽지방으로 떠나는 철새다. 이쯤되면 왜가리의 승리가 확실하다. 이 노래의 2절에선 뜸부기가 슬피운다. 그래서 가을에 슬피우는 새를 작사가는 왜가리를 1절에, 뜸부기를 2절에 넣었다.
'아 왜가리 슬피우니~'하면 웃기지 않은가. 그래서 으악새가 맞다.
한가지 더. 억새는 강가에 살지 않는다. 1절 가사에 '강물도 출렁출렁...'이라는 표현이 있다. 강가에는 갈대가 산다. 그래서 으악새는 왜가리가 확실하다. 왜가리는 강가에서 서식하니 딱 맞아 떨어진다.
'짝사랑'노래 자료를 찾다보니 으악새 만큼이나 혼동되는 사실을 발견했다. 작사가가 누구이냐는 것이다. 당초 노래는 고복수가 부른게 맞다. 그러나 '문화콘텐츠닷컴'에선 작사가가 김능인이라고 한 자료도 있고 박영호라고한 자료도 있다. 출처가 같은 곳인데도 다르다.
작사가가 김능인으로 표기된 악보
위 사진자료를 보면 1945년에 제작된 레코드판에 작사 박영호로 되어있다. 이 노래의 작사가는 박영호가 일단 맞다고 본다. 여기엔 사연이 있었다. 김능인(1911~1937)과 박영호(1911~1953)는 둘 다 일제시대에 활약한 대중가요 작사가이다. 물론 다른 작품활동도 했다. 박영호는 일제 말기 친일작품을 만들었고 1946년 월북한다. 해방 후 정부에선 1990년대에 해금될 때까지 문화계에 금지곡을 지정한다. 그 기준엔 월북작가들의 노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월북작가들의 노래는 아예 금지 되거나 작가를 바꾸어 표기하기도 하고 가사나 제목을 바꿔서 살아 남기도 했다. 박영호는 '번지없는 주막'을 작사한 사람이다. 그러면 '번지 없는 주막'과 '짝사랑'은 왜 금지곡이 안되었을까. '짝사랑'은 김능인이 작사한 것으로 바꾸었고, '번지 없는 주막'은 작사가가 '처녀림'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처녀림'은 박영호의 필명이다.
발걸음을 떼면서 노래 짝사랑이 절로 입에서 흥얼거려진다.
물론 앞 소절 뿐이지만.
하도 철새도래지의 갈대와 억새는 가을 풍경과 함께 몰랐던 사실 하나를 가르쳐 주었다.
■지미봉
해발 165m이고 북쪽으로 용암이 흘러나간 말굽형 화산체이다.
[출처] 제주역사나들이 9차 종달리 탐방코스|작성자 바람
탐라순력도에는 지미망(指尾望)으로 표기되어 있다. 봉수가 있는 오름을 봉, 또는 망이라 표기했다.
제주의 땅끝에 있어 지미(地尾)라고 한다는데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꼬리를 가리킨다(指尾)는 한자해석이 가능하다. 아닌게 아니라 성산 일출봉이 제주 본섬에 마치 꼬리처럼 달려있다. 일출봉을 제주의 꼬리로 여긴다면 꼬리인 일출봉을 가리키는 오름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게 맞다는 확신이 든다.
그렇다면 제주 서쪽을 본섬의 머리라 했을때 한경면의 두모리(頭毛里)라는 지명이 잘 맞아 떨어진다.
입구 안내판엔 경사가 급하나 거리가 짧아 20분이면 오를 수 있다고 써 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북쪽으로 오르는 길은 계단 없이 조성해 놓았다.
과연 경사가 급하다.
20분 걸린다는 길을 쉬지 않고 오르니 15분이 채 안되어 정상에 도착했다. 괜한 오기를 부렸더니 숨이 턱에 찬다.
지미봉 정상에선 제주 동쪽지역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 온다. 제주 본섬의 꼬리인 일출봉도 잘 보인다. 그래서 지미(指尾)봉이 확실하다.
위 사진에 보이는 종달마을 앞 대부분의 지역이 매립지(간척지)이다.
지미봉 정상에서 본 철새도래지
지미봉 남쪽 진입로는 100프로 계단이다. 내려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풍경이고 뭐고 발 헛딛지 않도록 계단을 노려봐야 한다. 계단의 폭과 높이가 제각각이라 넘어지기 쉽다.
■종달리
원래 종달은 종다릿개[終達浦]라는 이름에서 한자 차음한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에 다다랐느니 제주땅 끝에 달했다느니 하는 말이 있는데 믿을게 못 된다고 본다. 아무렴 어떤가.
19세기 중반까지는 정의현 좌면에 속했다. 지금으로 치면 서귀포 소속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북제주군 구좌면과 구좌읍에 속하였고 2006년 7월 제주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 북제주군이 없어지면서 제주시에 편입되었다.
제주에서는 비오는 날이 많아 육지에서와 같이 천일염을 생산하기가 어려워서 역설적으로 소금이 귀했다고 한다.
종달리는 과거 제주에서 최초로 염전이 만들어진 최대의 소금 생산지였다. 종달리 사람들을 '소금바치'라고 불렀다. 사람들의 신분이나 직업등에 따라 붙는 접미사가 꽤 있다. '-바치','-아치'도 마찬가지다. 가죽을 다루는 사람을 '갖바치'라 부르듯 종달리 염전 사람들을 '소금바치'라고 불렀던 거다.
그 만큼 많은 양의 소금이 이 곳에서 났다는 건데 지금은 마을회관 앞 소금밭 전시관이 그 흔적을 대신할 뿐이다.
종달리 소금은 마을 앞 드넓은 모래펄이 있어서 가능했다.
1900년대 초 종달리 마을 353호 가운데 160명이 소금 생산에 종사했고 소금을 생산하는 가마도 46개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지형적 특성상 만입부에 넓은 모래펄이 발달하여 염전 조성이 유리하고, 또한 근처에는 지미봉·두산봉 등 오름들과 야산이 해안에 인접해 있으므로 쉽게 연료(땔감)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드넓은 소금밭은 1957년부터 1969년에 걸쳐 시행된 간척사업으로 사라진다.
1914년도 종달리 부근 지적도를 통해 일일이 지번을 확인해서 해안선을 파악해 보았다. 놀라웠다. 노란색으로 표기된 부분이 바닷물이 드나들던 모래펄이었고 지금은 매립되어 경작지로 되있는 곳이다.
지금의 종달리 마을은 다른 마을처럼 해안선을 따라 가옥이 들어서 있었다. 간척사업때문에 결과적으로 내륙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종달리 앞바다엔 썰물 때는 건너갈 수 있는 섬이 세개나 있었고 농사를 지었다. 서쪽의 섬엔 집들도 있었다. 그 때 모습이 더 장관이었다고 본다. 아쉽다. 그 때 논으로 간척된 땅의 상당수가 갈대밭으로 변했다. 논농사가 마땅치 않았던거다. 나록을 생산해 보려는 당시의 절박함이 이해되나 지금의 관점에선 탑동 매립으로 잃어버린 제주시 탑아래 해안가 만큼이나 아쉽다.
직선으로 뻗은 길은 간척지임을 짐작케한다.
과거 해안가였을 곳에 위치한 어느 민가
간척지의 논이었던 곳은 갈대만이 무성하고, 밭으로 쓰기 위해서 다시 성토를 한 땅엔 작물이 자란다. 우영밭 한 뙤기라도 소중히 가꾸었던 제주인데 상당히 많은 면적의 땅이 갈대 숲으로 방치(?)되어 있어 궁금증이 인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철새도래지와 연결된 간척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곳에 소위 노는 땅이 많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바닷가 마을 어귀에 심어진 폭낭
종달리의 마을 안길은 하도리와 또 다르다. 곳곳에 집으로 향한 올레가 긴 곳이 많다.
한여름 마을 어르신들은 나무그늘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받고 장군멍군 하셨을 테고, 맞은편 점빵엔 동네 아이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을 것이다. 어릴 때 우리동네도 저런 집에 점빵이 있었다. 뽀빠이는 10원, 자야는 20원이었다. 얼음을 담은 고무로 된 풍선처럼 생긴 주머니를 넣은 사각통안의 아이스께끼는 지금도 그립다.
늦가을 언저리에 핀 분홍 애기동백꽃에 철모르는 벌이 한마리 앉아 있다가 폰 카메라를 들이대니 훌쩍 날아가 버린다. 이 계절에 벌이라니. 부지런한건지 무모한건지 모를 일이다.
늦가을의 종달리는 겨울채비를 한다고 동네 여기저기 앙상한 폭낭 가지가 말해준다.
종달리 마을 안길엔 옛집을 개조한 작은 가게들이 많다. 주인장의 센스가 돋보이는 가게들인데 아마도 젊은 외지인들 같다. 제주의 작은 마을이 이렇게라도 활력이 생기는 모습이 긍정적으로 보인다.
이와는 반대로 종달리 마을 안엔 빈집이나 빈 집터가 유독 많다. 제주의 다른 시골 마을도 그렇긴 하지만 여기는 더 많이 눈에 띈다. 이곳에 새 보금자리를 트는 이들이 많아져 마을이 활기차게 북적거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돌담(축담)으로 지어진 여느 집들과는 다른 집이 눈에 띈다. 안에서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이 집은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일본식 미장으로 마감한 집이다. 일명 아라이다시 (洗い出し, 세척노출미장)공법이다.
지금은 이 공법이 가능한 기술자도 드물다.
이 건축마감으로만 보아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당시엔 동네에서 꽤 고급이었을 이 집도 주변의 돌담집과 함께 늙어 간다.
눈으로 종달리 마을을 호젓하게 걸어보자.
담쟁이도 늦가을엔 빨간 단풍이 곱게 든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두고 볼 일이다. 결국엔 고운 빛깔을 보이니.
■엉물/청강사
청강사 대문 옆에 자리한 산물(용천수)이다. 여기도 길 건너편은 간척지이다.
예전엔 종달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식수원이었다. 안타깝게도 세월은 이 달고 찬 맑은 물을 여느 연못처럼 탁하게 바꿔 버렸다.
엉물을 맑은 강처럼 여겨 청강사라고 지었을까.
절의 기원은 자료부족으로 알 수 없지만 종달리의 생명수인 엉물을 보듬고 있는 절이면 꽤나 유서 깊을 듯 하다.
■종달리 패총4지구
도로로 편입된 종달리 1838-3번지 일대이다. 2000년 7월 발굴 조사를 통해 토기류, 청동구류 등 5~6세기 탐라국 시대의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곽지패총에서는 고동류가 80%이상인 반면 이곳에선 내만성 조개류가 80%이상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지금과 달리 내만이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는 증거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특히 산지천에서 발견된 화천(貨泉:기원전후 발행된 중국 엽전)이 이 곳에서도 발견되어 당시 제주도 내외의 문물 교류를 짐작케 해준다고 한다. 아직도 옛날 조개류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2000년의 세월을 마주한다.
땅을 메우고선 네땅 내땅의 구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돌담을 쌓았다. 허나 지금은 애써 메운땅은 버려졌고 새들과 바람은 구분없이 이쪽 저쪽을 드나든다. 경계를 두는 건 인간의 일이다. 이 돌담은 세월과 자연 앞에 인간의 덧없는 마음을 말해준다.
출발지인 금붕사로 돌아왔다. 지미봉 잠깐 오르는 일도 산행이라는 듯 적응 안된 다리가 무겁다.
가을이 끝나간다.